서울 광화문에서 퇴근해 강변북로를 달리던 그의 눈에 한강이 들어온다. 넓은 강폭에 갈매기도 날고 강을 가로지르는 그림 같은 대교들을 보자 고향의 광안대교가 떠오르며 코끝에 부산의 냄새가 스치기 시작한다. 많은 기억을 일깨우는 습하고 따스한 감각, 돼지국밥 냄새가 섞인 것도 같고, 자갈치 아지매의 고함소리도 함께 따라오는 듯한 그 냄새가.
부산 갈매기의 연서戀書
그는 “목소리가 크고, 말투는 투박한” 부산 남자다. 서울로 날아온 부산갈매기다. 서울 와서 직장 생활 20년에 제법 표준어를 구사하지만 부산 특유의 억양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한번 정을 주면 오랜 시간 변하지 않고 묵묵히 정을 주는” 탓에 20년 넘게 우승을 못해본 야구팀(롯데)의 광팬이다. 잠실운동장을 사직구장으로 여기며 틈나는 대로 드나드는 게 그 증거다. 입맛도 토종이라 돼지국밥부터 밀치회까지 고향의 맛을 주구장창 우려왔다. 대한민국에서 부산은 제2의 대도시이지만 서울에서 부산은 지방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아쌀한* 분노와 반감을 가진 아재이기도 하다.(*여기서 ‘아쌀한’이란 명쾌하고 깔끔하다는 뜻이다.)
그런 그가 페이스북에 부산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부산을 떠난 지 스무 해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사람들이 열화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감성 충만 아재의 고향 이야기엔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부산의 이런저런 동네들, 골목들, 시장들, 학교들, 식당들, 바닷가와 강변…. 그가 자란 부산의 공간들, 그가 먹은 음식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하자면 우리를 길러낸 것들과 동일하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면 우리의 내면이 통째로 들썩인다. 그의 이야기이지만 나의 이야기이기도 한 이 에세이집은 얼마 전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류와 비슷한 감성적 기제를 갖고 있다. 저자는 “어떤 평범한 사내가 자신의 태를 묻은 항구도시와 그 곳 사람들에게 보내는 연서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한다. 이 말은 절반만 맞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제2부에 있다. 제1부가 저자가 부산에서 살았던 장소, 먹었던 음식, 응원한 야구팀의 이야기라면 제2부는 서울에서의 정착기다. 이십대 후반에 서울로 유학 온 그는 ‘비범한’ 하숙생활을 경험했다. 신림동과 신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그의 하숙 어드벤처는 서울로 날아온 부산갈매기의 ‘방랑충만기’라는 점에서 제1부와 연결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방랑을 동행해준 벗들, 결코 평범하지 않고 때로는 기괴한 느낌마저 주는 캐릭터 분명한 그의 벗들이 그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40대 아재의 내면풍경
이 책은 단순히 부산 추억담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의 평범한 40대 직장인 남성이 어떤 감성을 지닌 채 살아가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영 페미’들의 날카로운 지적에 한국 중년 남성들이 많이 위축된 게 사실이니까. 그런 눈으로 내용을 읽어보면 이 책에 그려진 ‘아재’의 내면풍경이 ‘소년’처럼 맑고 잔잔하다는 걸, 품이 넓고, 세세한 관찰력과 감수성도 갖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철없고 단순한 측면도 여지없이 인정하게 된다. 여자들이 만약 이 책을 읽는다면 먹을 것과 스포츠에 환장하는 어떤 대목에서 남자들이란, 하며 혀를 쯧쯧 차다가도 공감하게 되리라 생각된다. 아재들이여, 용기를 가져라.
평범함 속의 반짝거림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평범함’에 있다. 물론 약간의 B급 정서가 흐르고 있긴 하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와 그가 겪어온 경로는 대학 나와 직장 들어가고 결혼해서 애 키우는 가장 평범한 코스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평범함’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삶의 경로가 평범하다고 해서, 나이 들어 고향 생각에 눈물 찔끔하는 일이 낯익은 풍경이라고 해서 우리 개개인이 실제로 ‘평범함’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것의 비범함이라는 일종의 역설이 그 속엔 도사리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저자의 경험들은 그가 유일하게 겪은 일들이고 그만의 시각과 대처 속에서 삶의 경험으로 무르익은 것들이다. 대개가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걸 ‘평범함’이라 부르지만 그런 개별적인 경험은 ‘별’처럼 반짝거린다. 너무 ‘기발한’ 것들에만 발언권을 주고 그러한 것들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통해 독자들도 그런 평범함 속의 반짝거림을 만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나를 키운 부산의 공간들
◎책방골목: 그가 태어난 곳은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할아버지가 그곳에서 자그마한 인쇄소를 운영하셨다. 조부모의 집에 갈 때 그는 203계단을 올라 산복도로를 만나곤 했다. 10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를 모신 관이 힘겹게 203 계단을 내려갔다. 멸치 박스를 찍어내던 인쇄소를 지나고 두 분이 미사를 드리던 중앙성당을 거쳐 할아버지는 공원묘지 한 귀퉁이에 누우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묻고 다시 올라오는 계단 중간참에 주저앉아 우셨다. 어린 그의 눈에 비친 할머니에게 다 큰 어른이 된 그가 말한다. “할머니 울지 마세요. 아직 계단을 100개도 더 올라가야 돼요.”
◎아버지: 그가 태어난 지 67일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교 국어교사였던 아버지는 태풍친 날 바닷가로 놀러간 학생들이 걱정돼 택시를 잡아타셨다가 빗길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한 날은 67일, 그의 기억에 단 하루도 남아 있지 않은 날들이었다. 지금 교정엔 제자들이 세운 고故 여석현 선생 추모비가 서 있다.
◎똥천: 간혹 상류에 있는 공장에서 화학약품이라도 풀면 희한한 색깔로 변하는 동천, 비가 오면 그나마 물이 좀 불어나던 똥천강과 함께 그의 중학교 생활은 그렇게 냄새를 풍기며 흘러갔다. 새로 부임해온 선생님들은 냄새 때문에 두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런 똥천강이 지금은 바닷물이 흐르는 도시하천으로 되살아났다.
◎ 두 극장: 나란히 붙어 있던 삼성극장과 삼일극장은 고3시절 그의 불안을 달래준 장소였다. 극장 안은 정말 지독하게도 쓸쓸했다. 실내에는 오래된 극장 특유의 곰팡내가 가득했고, 토요일 오후라 해도 손님은 열명 안팎이었다. 그들은 각자 부서진 앞자리 의자 위에 다리를 얹은 채 담배를 피우며 영화를 봤다. 2층에는 매점과 휴게실이 있었는데, 조그만 텔레비전이 야한 비디오를 틀어주고 있었다.
◎ 으랏차차 야구부: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소위 말하는 옛날 명문고였다. 역사도 깊은데다가 평준화가 되기 전에는 부산을 대표하는 양대 명문 중의 하나였고, 각계각층에 내로라하는 선배도 많았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그 학교에 배정받았을 때 무척 기뻐하셨다. 그도 정말 기뻤는데, 전국에서 알아주는 야구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락을 열면 계란 프라이 위로 벚꽃잎이 떨어지던 교정의 등나무 밑도 사랑했다.
◎ 매축지: 바다를 메워 만든 땅, 매축지에서 고교시절부터 7년을 살았다. 처음 이사온 날, 새벽에 집이 흔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무슨 지진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기차가 지나가는 중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나다녔다. 소음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기차가 지나가면 잠시 소리가 잘 안 들릴 정도였다.
◎ 부산은 산이다: 부산은 아주아주 높은 데까지 사람이 올라가서 살고 있다. 왜냐하면 평평한 땅이 별로 없으니까. 산자락이 바닷가 바로 앞까지 뻗어 있는 동네가 부산이다. 이렇게 비탈진 산동네에 3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살게 된 것은 순전히 외부적 요인 때문이 아니었을까. 육이오 동란 피란의 역사가 말해주듯.
나를 키운 부산의 음식들
◎새우튀김: 때로 기억은 뇌가 아니라 혀가 담당하는 기능이 아닐까 생각될 때도 있다. 음식에 얽힌 기억은 혀끝에서 되살아난다. 혀끝에서 되살아난 맛은 아픈 기억을 들쑤시기도 한다. 아주 어릴 때의 저자가 군침을 삼켰던 못골시장의 새우튀김이 그렇다. 자그마한 생새우 튀김. 그 고소한 냄새가 항상 그를 유혹했다. 한 개 50원 하던 튀김을 그는 틈날 때마다 사먹었다. 할머니는 이 조그만 단골이 귀여웠다. “새우 묵으로 왔제? 요고 묵어라. 요기 새로 한 기다”라고 반겼다. 손주 같은 아이가 맛있게 먹는 걸 보며 할머니는 학년을 묻고, 집을 묻고 기어코 “아부지는 머하시노”를 묻는다. 순간, “미국 유학가셨는데예”가 튀어나왔다. 그 뒤로도 할머니는 그를 보면 “아부지 편지 왔드나?” 하고 물으셨고. 아니라고 대답하면 참말로 이상타를 연발하셨다.
이외에도 이 책은 재첩국, 다리집 떡볶이, 밀치회, 양곱창, 순대, 잡채밥, 간짜장 등 부산 특유의 음식들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가 펼쳐져 있다. 특히 저자 덕분에 밀치회를 맛본 서울 강남의 아파트에 사는 아줌마가 밀치회 100만원 어치를 공구한 사연은 아줌마의 힘과 함께 “부드러우면서도 사박거리는” 식감의 밀치회에 대해 경의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