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에서의 500일,
인생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뜻밖의 만남에 관하여
이십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지만, 무언가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건 손에서 놔버려야 할 것 같아서 정작 아무것도 모르겠는 나이. 주위에서는 ‘아직 젊잖아’라고 말하지만 그 젊음 탓에 오히려 조바심이 들고, 그렇다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나날들. 그런 시간을 보내던 이십대 초반의 저자는 일단 외국에 한번 나가보면 어떨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 표를 끊는다. 그리고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캠프힐’에 도착한다.
『너는 어떻게 나에게 왔니』는 저자가 아일랜드의 캠프힐에서 보낸 500일간의 이야기와 ‘올리버’라는 친구와의 특별한 우정을 담은 책이다. ‘캠프힐Camphill’은 아일랜드의 작은 농가에서 시작한 장애인 공동체 마을로, 모든 것이 자급자족으로 이루어지는 마을의 시간은 목가적으로 흐른다. 매년 찾아와 머무르고 떠나는 여느 봉사자들처럼 저자 역시 봉사자로서 이곳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른 봉사자들과 시간을 보내며 조급한 마음은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흘러가는 이곳의 시간에 섞이기 시작한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러 봉사자들과 각 집안에서 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집 부모’ 그리고 유쾌한 친구들인 에단과 노아, 사랑과 우정을 알게 해준 올리버까지. 저자가 이곳에서 만난 인연들은 조금씩 그를 성장시킨다. 그것은 물질적인 성장이 아닌 조급하게 움켜쥐고 있는 마음들을 한 숨 내려놓을 수 있는 정신적인 성장이다.
특히 그와 가장 가까이서 생활한 ‘올리버’는 뇌성마비 때문에 몸이 불편하고 간질 발작이 찾아오기 때문에 24시간 누군가 함께 있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잘 때도 항상 저자는 머리맡에 올리버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베이비폰을 둔다. 처음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삐걱거리던 두 사람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중에는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 특히 수화를 만들어 대화하는 올리버가 저자를 가리키는 새로운 수화를 만들 정도로 가까워진다.
이 국적이 다른 두 청년의 만남과 관계 맺음, 그리고 성장은 『어린 왕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더 나아가면 『데미안』까지도 이제까지 접해온 여러 관계와 우정에 관한 책들처럼 우리의 마음을 애틋하게 울린다. 또 우리가 살면서 만나온, 그 사람이 있었기에 인생의 다음 장면으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만 같은 여러 특별하고 소중한 만남들을 하나둘 떠올리게도 한다.
저자는 이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제까지 삶에서 살피지 못했던 사람들의 표정의 의미도 기억해낸다. 노인들을 돌보는 복지센터에서 일하는 어머니의 마음도 헤아려도 보고 아버지의 사랑 방식도 어렴풋이 알게 되며 특수학교 교사가 된 친구와 자신의 생각을 나누게도 된다.
올리버,
너를 만나고 나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이 책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 작은 마을에서 만난 봄날’은 저자가 처음 아일랜드로 와서 1년에 가까이 머물며 ‘캠프힐’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올리버와 가까워지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고 ‘2부 기억의 여름 그리움의 가을’에서는 집안 사정으로 인해 잠시 한국에 돌아와 있는 동안 아일랜드에서의 시간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시간을 담았으며 마지막 ‘3부 겨울을 지나 다시 그곳으로’에서는 두고 온 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워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가 올리버와 조금 더 함께 있는 이야기와 그후의 이별에 관해 담았다.
누구보다 예민하게 타인의 마음을 살피는 올리버와 그와 함께 자주 울고 자주 웃으며 인생의 찬란한 시간들을 만들어가는 저자의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감정의 솔직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여러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나누는 것에 많이 부끄럽고 서투르다.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마음을 나누는 두 사람이 동화 같은 세상에서 겪은 진짜 동화 같은 500일. 이 시간은 저자가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을 떠나 다시 한국에 돌아와 현실에 발을 담그며 살면서도, 그를 여전히 환하게 살게 해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책 속에서
우리가 돌보는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것 같지만 우리 주변의 공기들을 마시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으며 느낀다. 이 친구들은 오감이 아니라 육감, 아마도 칠감에 팔감까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부 파악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략) 그해 가을부터 올리버는 내게 마음을 열었고 손으로 코를 가리키는 것으로 민수라는 사인도 만들어주었다.
_ 본문 61쪽 [마음이 열리는 순간들]
저녁에 걷는 건 낮에 산책하는 기분과는 사뭇 달라요. 빛이 밝지 않으니 올리버는 저에게 더 의지하게 되지요. 아무리 달이 밝아도 눈이 좋지 않은 올리버에게는 지켜줄 누군가가 필요하거든요. 무엇이 위험한지 위험하지 않은지 감지하지 못하는 그이기에 더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어요. 평소 산책할 때 올리버는 오른손을 제 왼손과 맞잡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손을 더 단단하게 잡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눈에 보이지 않은 무언가가 굳건히 우리를 묶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_ 본문 71쪽 [달을 따라 걷는 길]
(오늘 내가 미안해.)
배를 쓰다듬는 건 미안하다라는 우리끼리의 수화이거든요.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 나도 미안해, 하며 안아주고는 불을 끄고 방을 급하게 나와 문 앞에 서서 엉엉 울어버렸어요.
나를 알아주던 친구가 참 고마웠고 감정을 들켜버린 제가 부끄러웠어요. 당신을 도와주려 애쓰는 사람은 나인데 정작 언제나 치유받고 돌아서는 사람은 저였던 거예요.
_ 본문 93쪽 [배를 만진다는 것]
올리버가 잠들기 전에 나는 항상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우리가 오후에 산책을 하면서 본 개미떼 이야기, 젖소가 새끼를 친 이야기, 내일은 비가 올 거라는 이야기, 오늘 만든 핫초콜릿은 영 맛이 없었다는 시덥잖은 이야기까지.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이야기들로 마무리짓던 밤, 우리에겐 늘 내일이 찾아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시시콜콜한 내일도, 지루한 모레도, 꼭 찾아와주길 바랐다.
_ 본문 191쪽 [잠들기 전에]
어느 날은 알란이 혼자 영국으로 일주일 정도 떠나게 되는 날이었어요. 부인의 볼에 키스를 해주더니 저를 쳐다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 없는 동안 나의 달링My Darling 잘 지켜줘, 민수.”
우리 부인도 아니고 우리 마담도 아니고 나의 달링이래요. 내 자기를 잘 지켜달라고 말해요. 무릎이 아파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 정작 자기는 몸이 안 좋아서 침대에 자주 누워 있어야 하면서. 순간 제 머릿속 사랑의 질서가 새로 정립되는 순간이었어요.
_ 본문 268쪽 [알란과 도리스]
올리버가 혼자 일어나 어딘가로 향한다는 것을 느낀 에단이 그를 따라갔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거실에 앉아 본능적으로 책을 펼친 올리버에게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가끔 잠에서 깨면 내 방으로 먼저 오는데 오늘은 왜 거실로 갔을까. 십 년간 함께 지낸 친구들의 우정은 이런 것이었다.
_ 본문 276쪽 [그의 부재]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단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돈보다 더 중요한 사실들을 깨닫고 있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있겠냐만 이 일 또한 참 힘들다는 걸 너도 눈으로 봐서 알겠지. 항상 죽음을 마주하고 삶의 끝에서 매달린 사람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그들의 삶을 끊임없이 연장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야. (중략) 니가 아일랜드에서 보고 느끼고 온 것들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은 상상이 간단다. 참 대견해, 우리 아들.”
_ 본문 280쪽 [엄마와 아들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