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의 나이에 파리에서 여성의 삶에 작용하는 여러 사회심리학적 요인들에 관해 연구해 박사학위를 딴 심리학자 장미란이 첫번째 책을 출간했다. 장미란은 그간 파리에서의 걷기와 인문학적 사색과 성찰에 관한 책들로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회학자 정수복의 아내다. 그러나 이 책을 쓰면서 그녀는 누구의 아내도, 딸도, 엄마도, 며느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수많은 속박과 편견, 여성 혐오로 넘쳐나는 한국 사회에서 탈출해, 당당하고 주체적인 파리의 여성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함께 내밀한 대화를 나눈다.
지금까지 프랑스 여성들은 아름다운 몸매와 세련미, 뛰어난 패션감각 등 외적인 것으로만 조명되어왔다. 그러나 장미란은 그녀들의 외면이 아닌 내면 속으로 들어간다. 프랑스 여성들은 세계에서 항우울제 복용량이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완벽해 보이고 당당해 보이는 그녀들이 항우울제를 먹으며 견뎌야 할 고통의 내역들은 과연 무엇일까? 여성 심리학자 장미란이 세상의 편견과 가족사의 고난을 뚫고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분투한 파리 여자들의 치열한 인생과 내면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그들에게는 여성으로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부드럽고 달콤한 듯하지만 속은 강하다. 자유롭고 당당하며, 때로 파격적이며 반항 정신이 있다. 그들은 열정에 충실치 못하게 사는 인생을 실패로 본다.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데 그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열정에 충실한 삶을 살다보니 자연 상처도 많다.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 자신의 삶을 추스르고 또다른 삶을 만들어나간다.
나는 프랑스 여성들과 만나면서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여성의 문제는 무엇이고, 여성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이며, 여성들은 왜 그런 것을 바라는지를 물었다. 여성운동의 결과 여성이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이며 앞으로 더 얻을 것은 무엇이며 남성들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물었다.
나는 이 책에서 프랑스 여성들과 그들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려고 했다. 마음에 묻어둔 할 이야기가 많은데 말할 상대를 찾지 못한 여성들, 쓸 이야기는 많은데 자유로운 시간과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여성들을 떠올렸다. 나는 그런 여성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_책머리에 중에서
파리 부유층 아파트의 여성 경비,
사라진 귀족제도의 끝자락에서 홀로 자존감을 지키려는 남작부인,
엄마의 불륜을 목격한 딸의 무너진 마음,
전남편, 그의 새로운 부인, 현 남편과 동반 가족여행을 떠난 여자…
심리학자 장미란이 만난 프랑스 여성들의 치열한 삶과 내면 이야기
마치 소설 같은 유려한 문체로 여성들의 감정의 역사를 세밀하게 포착한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파리라는 화려한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커리어우먼들, 전문직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파리에 이런 여자도 살고 있어?’ 싶은 여성들이 가득하다.
이 책에서 첫번째 소개되는 여성은 튀니지에서 파리로 이민 온 여성 라시다이다. 라시다는 파리 부유층 아파트의 관리인으로 살고 있다. 웬만하면 이미 고용한 사람을 해고하지 못하는 프랑스 노동법에 따라서, 그녀는 자신이 관리하는 아파트의 한 집을 차지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누려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빈자리가 있다.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는 파리이지만, 파리는 이방인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부유층 아파트의 파리지앵들은 그녀를 여전히 ‘파리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아랫사람 대하듯 한다. 게다가 그녀는 아이를 갖지 못한다.
심리학자 장미란은 그녀의 일과 삶을 돌아보면서 고향 튀니지에서는 파리에서 온 여왕처럼 대접받지만, 정작 파리에서는 ‘하녀’처럼 취급받는 이민자 여성의 고통을 응시한다. 파리에서 살고 일한다고 해서 모두 다 ‘파리지엔느’로 대우받진 못한다. 파리에서 수십 년간 일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못사는 나라에서 돈 벌러 와서 진짜 ‘파리지엔느’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국외자의 설움을 겪는다. 자신을 지켜줄 남자와 가정이 너무도 절실하지만, 그녀의 안정적인 직업과 주소지는 그녀를 사랑하는 ‘척’하는 불법체류자들이 프랑스 국적을 얻는 수단으로 쓰일 뿐이다. 그녀는 버림받고 버림받고 또 버림받는다.
한편 장미란은 현대에는 사라진 줄 알았던 프랑스 귀족부인을 만나, 사라져가는 프랑스 귀족의 오래된 전통과 품위를 고수하고자 하는 그녀의 신념에 대해 듣기도 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오만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물려받은 유산과 성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평생을 살아가며 ‘매일 출퇴근하며 월급을 받는 직장인의 삶’을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 남작부인의 삶이 의아하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어떤 식으로든 내면에 지켜야 할 자기만의 요새를 건축하고,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 분투하는 또다른 프랑스 여성의 하나임을, 이런 별난 삶 또한 존중받고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장미란은 서서히 깨달아간다.
파리지엔느의 남편이 폭력을 휘둘렀을 때,
그 남자가 갈 곳은 단 두 곳뿐, 감옥 또는 정신병원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 다수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배우자와의 이별이나 이혼을 겪는다. 이혼 후 재혼하는 여성도 많은데, 이 책에는 재미있는 사례가 하나 나와 있다. 전남편과 현 남편의 아이를 같이 키우고 있는 마농이라는 여성이 현 남편과 아이들은 물론, 전남편과 그의 새 부인까지 다 같이 떠나는 뉴욕 여행을 계획하는 장면이다. 아니, 이건 여행은커녕 밥 한 끼 먹기도 꺼려지는 조합이 아닌가 싶지만, 마농은 거리낌이 없다.
전남편과 같이 떠나는 여행에 반대하는 현 남편에게는 “아니, 나하고 25년을 같이 살았는데 아직도 그렇게 자신이 없어?”라고 일갈하고, “웬 희한한 발상이야?”라고 되묻는 현 남편의 아들에게는 “너뿐만 아니라 모든 아들은 각자 다 친어머니 친아버지와 함께 여행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 ‘범가족적’인 여행은 반박할 논리가 없는 마농의 추진력에 의해 성사된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기에 마냥 신기한 일화들은 또 있다. 파리에서 일어난 어느 부부싸움의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화티마 부부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났다. 화티마의 남편이 어느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유리창을 깬 것이다. 프랑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남자가 갈 곳은 딱 두 군데다. 감옥 또는 정신병원.
우리나라에선 남의 집 복잡한 가정사로 취급받기 일쑤인 가정폭력에도 프랑스 공공조직은 이토록 기민하게 대응한다. 확실히 여성 인권의 측면에서 프랑스는 한국보다 진일보한 나라인 것이다.
그러나 파리지엔느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과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장미란은 클레르라는 여성에게 다음 생에서 또다시 여성으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다.
만약 클레르가 다음 두번째 생에서 다시 여성으로 태어난다면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을까? 나의 질문에 클레르는 웃으면서 순간적으로 농담처럼 대답했다.
“아! 나는 두번째 인생만으로는 안 돼. 세번째, 네번째 생이 있어야 해.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랑, 용기가 없어서 시작도 못했던 사랑들을 한 번씩 다 해보아야 하니까……”
웃으며 가볍게 대답하더니 잠시 후 얼굴 표정이 사뭇 진지해지면서 다시 답을 했다.
“난, 날씬한 여성으로 살고 싶어!” _본문에서
파리지엔느들에 대해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환상만큼이나, 실제로 파리에 사는 여성들은 많은 압박과 부담에 시달린다. 그들이 세계에서 항우울제를 가장 많이 먹는 여성군으로 꼽히는 것은 외적으로 아름답고, 일적으로 완벽하고, 내적으로 주체적이면서, 사회적으로 자아실현까지 해내야 한다는 파리지엔느들에 대한 요구와 편견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심리학자 장미란은 파리에서 여성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파리지엔느들이 쉽사리 내비치지 않는 고통과 슬픔의 일면들을 순간순간 엿보고 기록했다. 때로 그녀들의 고통과 싸움은 한국 여성들의 것과 흡사했고, 또 때로는 한국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 환경 속에 있음에도 더 큰 고통을 겪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장미란은 이 책에서 화려한 파리지엔느들의 이미지 너머에서 벌어지는 그녀들의 처절한 고통과 분투를 다루며 지금 한국의 여성들을 향해 말을 걸고 있다. 이렇듯 파리에서건 한국에서건 여성들의 내면은 저마다의 이유로 복잡하고 힘겹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지금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나아가고 있다고. 그리고 여성들이 나아가는 만큼, 여성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이 세상도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