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법문(法文)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김달진 산문 전집 출간
전 19종 22권에 달하는 ‘김달진 전집’ 중 제1권 『김달진 詩 전집』(97년 6월 출간)과 제3권 『손오병서(孫吳兵書)』(98년 3월 출간)에 이어 제2권 산문 전집 『산거일기(山居日記)』가 세번째로 출간되었다.
『산거일기』는 김달진 선생의 수많은 저작 중 순수 창작물로서는 두번째 권이 된다. 『김달진 詩 전집』이 선생의 시를 집대성한 것이라면 『산거일기』는 선생의 산문글을 집대성한 산문 전집이다. 선생의 사위인 최동호 교수에 따르면, 선생께서 작고하실 때 늘 사용하시던 책상에 남기신 유고를 수습한 것이 바로 이 산문집이라고 한다. 선생은 1977년 봄 고희를 맞아 ‘여일록(餘日錄)’이란 제목의 시문집을 간행하고자 14∼15년 동안 다섯 개의 원고지 묶음으로 정리한 이 원고를 보관해오셨으나 여의치 않아 그의 사위가 사후에 산문집으로 엮게 된 것이다.
지난 6월 6일 개최된 제9회 김달진문학상 시상에 즈음하여 간행된 김달진 선생의 이 산문 전집은 인생의 참된 의미와 선(禪)적 이상, 그리고 법문(法文)에 대한 깊은 통찰과 탁월한 인식을 유려한 문체로 풀어냄으로써 산문 문학의 한 전범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선생의 문학적 행보와 불교 경전 번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 삶의 여정을 전체적으로 세밀하게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오늘의 난관을 헤쳐가는 지혜로운 방편과 미래를 예견하는 눈부신 혜안
이 책은 김달진 선생이 1990년 세계사에서 간행한 산문집 『산거일기(山居日記)』를 저본으로 하였다. 다만 「『붓다차리타』에 대하여」는 ‘김달진 전집’ 중 한 권인 『붓다차리타』에 해설로 묶일 예정이어서 이 산문 전집에서는 제외하였다. 그리고 제1권 『김달진 詩 전집』에서 유보해두었던 김달진론 다섯 편을 4부로 해서 새로이 추가하였다.
이 책의 제1부 ‘산거일기(山居日記)’는 금강산 유점사 시절인 1941년 선생이 34세 전후에 쓰신 일기문 초록이며, 제2부 ‘삶을 위한 명상’은 『법구경』을 간행하신 1965년 선생의 58세 전후의 단상집이다. 또한 3부는 선생의 비평적인 글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 김달진 선생은 일기문의 형식을 빈 글에서 일상의 자잘한 것들로부터 평범하나 심오한 삶의 단상들을 세심하게 길어올린다. 그 단상의 중심으로 흐르는 것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며, 삶 그것으로부터 솟아나는 안온함의 추구이다. 풍경 소리와 더불어 법문(法文)의 그윽한 향기에 취하며, 고승 대덕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삶과 문학의 진정성을 탐구하는 선생의 유려한 글들은 우리 문학사에 소중히 각인된 한 거장의 커다란 예술적 행보를 가늠하기에 더없이 값진 자산임에 틀림없다.
제2부 ‘삶을 위한 명상’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덕목과 가치들에 대한 선생의 통찰력 있는 아포리즘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 우주, 존재와 같은 철학적인 주제에 대한 탐구에서부터 겸허한 삶의 태도, 타인을 향한 열린 마음, 금욕을 통한 진정한 자유의 추구 등 온갖 유혹과 곤난으로 점철된 난마 같은 삶을 헤쳐가는 지혜로운 방편들이 평이한 문장 속에 담겨 있다. 또한 날카로운 문명 비판의 몇몇 글에서는 미래를 예견하는 눈부신 혜안을 발견할 수 있다.
고귀한 인간상을 추구하는 무심(無心)의 경지
“신(神)에게 있어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영원한 비극이 있다면, 그것은 자살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인생의 악취에 질식하면서 자살할 수 없는 운명적인 우울의…….”
“현명한 사람은 남을 믿지 않는다. 더구나 여성을 믿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인 줄을 알 뿐만 아니라, 반면에 믿을 것이 있다면 오직 자기 자신뿐인 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가슴속이라는 것이 거울의 표면처럼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거리에서 사람들의 위풍당당한 활보는 눈물겨운 희극이다.”
“최선의 사랑이라도 그 마지막 잔의 한 방울까지 쓰디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거기에 창조에의 목마름과 동경이 있다. 그러나 단순한 사악의 본능을 이탈하지 않는 한 사랑의 고통은 의연히 존재할 것이다.”
간단히 인용해본 이 글들만으로도 김달진 선생의 탁월한 인식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짧은 글들 편편마다 고귀한 인간상을 추구하는 선생의 숭엄한 정신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3부에 수록된 세 편의 글 또한 글 읽기의 매력을 가득 담고 있다. 특히 「장자와 무위자연의 사상」에서는 장자의 사상과 문장, 우주관에 이르기까지 장자 해독의 독특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고, 자전적인 글 「나의 인생, 나의 불교」에서는 선생의 성장과 문학에의 입문 과정, 문학적 삶의 여정 등을 직접 쓴 시를 인용하며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선생의 삶의 발자취를 더듬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오랜 수도 생활과 시적 수련으로 응축된 유려한 문장
오랜 동안의 수도 생활과 시적 수련 등으로 응축된 유려한 문장이 돋보이는 김달진 산문 전집 『산거일기』는 선생의 80여 년의 문학적 삶뿐만 아니라 불경 번역의 외길을 묵묵히 걸어온 숭엄한 정신세계를 선생의 저술을 통해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참으로 의의가 크다.
이 산문집을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 동양학의 커다란 봉우리인 김달진 선생의 삶과 문학, 그리고 인생에 대한 거장다운 통찰을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암울한 세기말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다시금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좋은 지침서가 되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김달진 전집을 펴내며
『시인부락』의 시인이며, 승려이고 한학자였으며 향리의 교사였던 김달진 선생은 평생을 세간에서 멀리 떨어져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고고한 정신의 세계를 천착하였다. 영원한 세계, 절대적인 세계를 향한 동경과 세속의 명리에 대한 부정은 구도자로서 선생의 인간과 학문을 되새겨보게 만든다. 시대의 대세가 서구문화의 논리와 서구풍의 취향에 기울어져 있을 때 김달진 선생이 추구했던 세계는 매우 이채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김달진 선생의 시적 업적과 동양학으로 지칭될 불교와 한학의 섭렵은 80여 년에 걸쳐 축적된 것으로서 오늘의 우리에게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하나의 장관으로 비쳐질 것임에 틀림없다.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기를 목도하고 있는 우리에게 선생이 성취한 지혜와 학문은 그 진가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문학의 정신이 쇠퇴하고 새로운 과학기술 문명의 탄생이 예고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깊은 삶의 예지를 머금은 선생의 저작을 하나로 묶어 뜻있는 독자들에게 제공하여 새로운 인간학의 정립에 기여하고자 한다. 절대적 진리의 도의 기준에서 볼 때 인간은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지만 그 진리를 깨닫는다는 점에서 인간은 위대하다. 호화찬란한 과학문명 또한 참다운 의미에서 인간학이 정립되지 않는다면, 가공할 만한 괴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세기말적 해체와 혼돈의 와중에서 우리가 김달진 선생의 저작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와 슬기는 물질만능과 탐욕의 어둠을 밝혀줄 등불이 될 것임을 확신하는 바이다.
―편집위원 : 김용직(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김장호(시인, 동국대 명예교수) 김종길(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박경훈(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신상철(수필가, 경남대 교수) 오세영(시인, 서울대 교수) 유종호(문학평론가, 연세대 석좌교수) 정현종(시인, 연세대 교수) 홍기삼(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 최동호(시인, 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