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환상의 미묘한 시차를 감각하는 작가,
박화영이 조각하는 기괴하고도 따스한 악몽
박화영이 상상한 이 모든 이야기들, 평행세계로 가는 화장실, 불길한 공터, 유령들이 걸어다니는 골목, 사람이 알을 낳는 닭 가공 공장 등을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도시 괴담, 정체불명으로 출현한 기둥과 벽에 대한 목격담들, 신체의 한 기관이 신체 전부를 삼키는 꿈은 좀처럼 깨어나기 힘든 악몽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렇다면 이 작가를 ‘악몽 조각가’라고 명명해볼 수 있을까. 비유컨대 작가는 “악몽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구명정 같은 곳에서 작업을 하는” 존재이고, 악몽은 제아무리 “살아서 날뛰는 거대한 공룡” 같더라도 일단 “마음의 돌”에 조각하고 구체화할수록 “분석 가능한 것” “돌에 새겨진 화석”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된다. 게다가 고통과 울분에 짓눌리지 않으려는 소설 곳곳의 유머러스한 문장은 박화영의 첫 소설집을 더욱 빛낸다. 이제 작가가 어떠한 상상의 날개를 달고 이야기의 하늘로 승천할지 여유롭게 지켜볼 일만 남았다. _복도훈(문학평론가)
일상이 다른 용법으로 구부러질 때
조용히 우글거리기 시작하는 기담의 세계
2009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공터」가 당선되어 등단한 박화영의 첫 소설집 『악몽 조각가』가 출간되었다. 「공터」는 동네 사람들이 버려진 공터에 쓰레기와 함께 감추고 싶은 비밀을 투기하면서 벌어지는 불길한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던 문학평론가 김윤식, 소설가 오정희는 흔한 유형에서 벗어난 글쓰기를 통해 “소설을 내면성에 가두지 않고 과감히 공터로 끌어내어 속도감 있는 단문, 드라이한 문체로” 펼쳐냈다고 평했다. 이후 박화영은 “풍부한 ‘스토리’들과 장면 전환의 자연스러운 흐름”(신춘문예 심사평)을 무기로 남들과는 다른 기묘한 소설세계를 풍부하게 일구어왔다.
그렇게 묶인 이 소설집의 도처에는 생명력을 지니고 꿈틀거리는 섬찟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화장실이 안에 든 사람을 그 사람의 의지와 관계없이 평행세계로 보내버리고(「화장실 가이드」), 어느 날 도심의 광장 한가운데 나타난 벽이 점점 높고 길게 자라 도시를 반으로 가르며(「벽」), 더이상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무정란 도시’에서 한 여자가 예감이 좋지 않은 무언가를 잉태한다(「무정란 도시」). 달아날 수 없는 악몽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꿈속의 작업실에서 악몽을 조각하거나(「악몽 조각가」), 갑자기 혀가 몸속으로 빠져들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각 부위에 얽힌 과거의 상처들이 되살아나기도 하고(「혀」), 모두가 잠든 밤에 어두운 골목이 다른 차원의 세계로 깨어나면 머리 없는 유령이 자기 머리를 발로 차며 그 길 위를 걸어다니기도 한다(「골목의 이면」).
기묘하고 공포스러운 현상을 일상 속에 침투시키는 박화영 소설의 환상성에 주목할 때, 눈에 띄는 점은 작가가 환상세계를 그리는 방식이다. 박화영 소설에서 “환상은 현실과 다른 차원에 속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 공간이 특별한 사연을 만나 “조금 다른 용법으로 구부러질 때 열리는” 세계다(복도훈, 해설). 즉, 박화영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세계를 만들어내기보다는 현실 밑에 겹쳐진 채 이미 존재하고 있을 법한 환상을 현실 위로 올려놓는다. 그래서 『악몽 조각가』를 읽을 때 우리는 3D 입체 안경을 쓴 것처럼 하나의 화면 위에서 현실과 환상을 동시에 보고, 그 사이의 미묘한 시차를 감각하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박화영 소설이 단순한 괴담으로 종결되지 않는 또하나의 이유는 박화영이 내세우는 서술자들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담담하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집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사건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초자연현상들이다. 그런데 박화영의 서술자들은 소름 끼치고 절망스러운 상황을 자신이 처한 현실로 애써 받아들이고 나서야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하다. 인물들의 차분한 행적은 그들이 갑작스레 내던져진 괴기스러운 현재와 충돌하며 묘한 충격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들의 입을 빌려 박화영이 태연하게 구사하는 정련된 문장과 그 속에 담긴 냉소 섞인 유머가 작가의 소설을 독특하고 세련된 기담으로 완성시킨다. 그렇게 우리는 『악몽 조각가』를 읽으며 슬프면서도 웃음이 나고, 기괴하면서도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어떤 것과도 닮고 싶지 않다는 열망
박화영 소설세계의 기원을 새기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시그니처를 소설 속에 새겨내려는 박화영의 시도는 단편 「주」에 이르러 과감한 형식 실험으로 이어진다. 가상의 책에 달린 후주라는 형식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 작품은 『악몽 조각가』의 마지막 소설로 자리하여 얼핏 소설집의 후주처럼도 보이도록 위장되어 있다. 땅속 깊이 거꾸로 박혀 있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기둥柱에 관해 부연하는 이 60여 개의 주註는우리로서는 읽을 수 없는 책의 내용을 짜맞출 퍼즐 조각이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와 주석의 행간에 숨겨진 이야기를 조합해 독자 스스로 또다른 상상을 펼쳐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책의 맨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도 남다르다. 박화영은 ‘작가의 말’ 원고 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작가의 말’을 쓰기 위해 누구의 조언을 구했고, 어떤 도서를 참고했으며, 그 책에는 어떤 중요한 주의사항들이 적혀 있었는지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이 ‘작가의 말’은 단순한 집필 후기로 남는 것이 아니라, 박화영이라는 작가와 그의 소설이 지닌 분위기를 집약해 전달하는 또다른 장치로 기능한다.
『악몽 조각가』는 박화영이 무엇과도 같지 않으려는 기발한 시도를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 완성한 첫 결과물이다. 덕분에 이 책을 읽을 독자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흥미롭게 책장을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박화영만이 꿈꾸고 조각할 수 있는 이 악몽 같은 이야기들은 한동안 우리의 의식에 달라붙어 끈질기게 감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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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썼으니 이제 물을 한 모금 마셔도 괜찮을 듯하다. 사실 작가의 말을 쓸 때 주의해야 할 점 가운데 하나가 물은 글을 다 쓰고 나서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지침은 물론 『작가의 말 작법』에 실려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물과 관련된 조언과 함께 불우했던 19세기 어느 영국 작가의 사연을 전하고 있다. 이 무명 작가는 생애 첫 책의 출판을 앞두고 마지막 작업으로 작가의 말만 남겨두었다고 한다. 작가의 말만 마무리지으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대작이 잉크 냄새를 풀풀 풍기며 미천한 서점 진열대 위에 강림하실 예정이었으나 결국 그 책은 계속 하늘 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 말을 쓰다 말고 저자가 콜레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 불우한 저자가 잘못한 일이라곤 글을 쓰기 직전 물을 한 잔 마신 것뿐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물은 콜레라균에 감염되어 있었고 가뜩이나 대작을 쓰느라 심신이 지쳐 있던 작가는 병을 이겨내지 못했다. (…)
내 책이 물론 그 불우한 작가의 책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나름 고생한 만큼 서점 진열대의 미미한 구석에라도 자리잡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_‘작가의 말’에서
■본문 중에서
화장실은 언제나 어딘가의 구석에 자리한다. 조금은 비밀스럽고 사적인데다가 청결과 불결이 공존하는 곳이라면 으레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화장실에서 꽤 여러 가지 기이한 일들을 겪을 수 있다.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도 그러한 현상 가운데 하나다. 1년에 100만 명당 0.5명꼴로 화장실 실종사건은 실제로 일어난다. 나 역시 그 일을 직접 경험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도시의 여러 화장실을 안내하는 화장실 가이드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화장실을 안내하러 다니다보면 언젠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줄곧 나오지 않고 있는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_「화장실 가이드」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대.’ 그녀는 언제부턴가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내게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걱정되었지만 계속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말을 듣다보니 그즈음에는 심드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마치 휴양지 같네.’ 나의 말에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시원하게 웃고 나서 말했다. ‘나 같은 사람들에겐 휴양지나 다름없지. 믿어져? 죽으러 가는 자리가 가장 마음 편한 곳이라는 게?’ _「자살 관광특구」
처음에는 집회가 시끄럽긴 해도 나름 질서를 지켜가며 진행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무질서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서로에게 욕을 해대며 시위는 과격해졌다. 집회 주동자가 흥분한 참가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벽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집회를 벌이던 사람 하나도 벽 위로 올라섰다. 벽에 올라선 두 사람은 원래의 목적을 잊고 이내 서로를 향해 고함을 치며 언쟁을 벌였다. 광장을 둘러싼 경찰은 위험하니 어서 빨리 벽에서 내려오라는 경고 방송을 내보냈다. 그때 벽이 갑자기 1미터가량 빠르게 솟구쳤다. _「벽」
언제부터인가 도시에서는 성별을 지니지 않은 아이들만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천사의 아이들’로 불렸다. 명칭과 달리 천사의 아이들은 태어나는 족족 거의 모두가 버려졌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마저 태어나지 않게 되자 사람들은 버린 아이들을 하나둘 다시 거두었고, 급기야 천사처럼 대우하며 보호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갖고 싶었던 사람들은 점차 도시를 떠났다. 대신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의 인구는 점점 늘어갔다. 그리고 이제 막 여자가 도시의 인구수를 증가시키는 데 한몫을 거들 참이었다. 그것도 전대미문의 임신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_「무정란 도시」
힘겹게 잠에서 깨어나 식은땀이 가득한 손을 벌벌 떨며 컴퓨터를 켜고는 악몽 조각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나는 솔직히 당신의 처방을 아직도 믿지는 않지만 당신에 대한 불신을 유지하기에는 나의 절망이 너무나 크다고 썼다. (…)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전화가 울렸다. 악몽 조각가가 휴대전화 너머에서 웃으며 말했다. “입금 확인했습니다. 그럼 다시 꿈을 꿔볼까요?” _「악몽 조각가」
나는 종아리에 울룩불룩 튀어나온 혀의 윤곽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매만졌다. 길쭉한 혀는 나뭇잎처럼 보이기도 했다. 약간의 온기도 느껴졌다. 나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손이 닿자 혀가 잠깐 움찔했다. 그러다가 이내 말 잘 듣는 고양이처럼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혀만큼 나를 잘 알아주는 대상은 여태껏 없었다. 혀는 이후에도 내 몸 곳곳을 돌아다니며 맛을 보고 통증을 일으키고, 환각을 보여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몸과 마음이 치료되는 느낌이었다. _「혀」
골목길로 취객들이 들어서면서부터 안쪽의 붉은 대문 집은 사라지고 아침에 동네 주민들이 구경했을 때와 똑같은, 새까맣게 탄 잿더미만이 남아 있다. 유령도, 사람 형상도, 그들만의 별자리도, 애드벌룬도, 네눈박이산누에나방도 모두 사라진다. 그 밖의 것들도 여기저기 흩어진다. 대칭으로 서 있던 가로등은 다시 듬성듬성 자리한다. 골목길 한가운데에 일렬로 죽 놓여 있던 맨홀 뚜껑들도 모두 저마다의 자리로 불규칙하게 옮겨간다. 그곳과 달리 이곳은 항상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 다시 비대칭적이고 불규칙한 세계로 돌아온 골목길은 믿을 수 없고 납득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곳이 된다._「골목의 이면」
■차례
화장실 가이드 _007
자살 관광특구 _037
벽 _067
무정란 도시 _097
악몽 조각가 _131
공터 _161
혀 _191
골목의 이면 _217
주 _245
해설|복도훈(문학평론가)
토템과 터부 _271
작가의 말 _291
■박화영 1977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2009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공터」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