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대표적인 젊은 작가 7인이 보여주는 숨가쁜 탐색과 성찰의 언어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 일곱 명의 소설집『서정시대』가 출간되었다.
『서정시대』는 계간 『문학동네』 96년 여름호부터 97년 겨울호까지 젊은작가특집에서 집중 조명한 작가 일곱 명이 자전소
설이라는 타이틀로 쓴 작품들을 묶은 것이다.
유년시절로 되돌아가 자신의 삶을 재관찰하거나 가장 예민했던 젊은날 첫사랑의 아쉬움을 토로하거나 현재의 일상을 세세하게
그리거나 간에 이들 일곱 명의 치열한 내면 기록은 자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여타 작품에서는 읽을 수 없는 그들의 은
밀한 정신세계와 작가로서의 고통스런 삶의 단면을 엿보게 하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다시 말하면 소설집『서정시대』는 왜 쓰는가라는, 아무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이 물음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일곱 명의 젊
은 작가들이 정면으로 맞선 치열한 고뇌의 흔적인 것이다. 글쓰기의 원천적 존재조건에 대한 진지한 탐사인 이 작업은 대단히 위
험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작가 자신의 실존적 뿌리를 더듬어 캐내야 하고 자신의 가장 내밀한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야 하기 때
문이다. "세계라고 하는 이 가면무도회장"에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은폐하고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를 노출시킨 젊은 작
가 7인의 이 비밀스런 파일을 통해 우리는 글쓰기의 고통과 희열, 그리고 소설적 진실의 승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채영주 「미끄럼을 타고 온 절망」
"그해 여름 내 나이는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알 수 없는 젊음의 열병에 사로잡혀 방황하던 채영주의 이십대 삶이 애잔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남도지방을 여행하던 중 잠시
머문 도시의 어느 룸살롱에서 만난 한 여급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모딜리아니라 불리는 이 호스티스는 동료 여급들이
고스톱을 치고 있는 홀 안에서 저니의 <오픈 암스>란 노래를 간절하게 부른다.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나의 삶에 그녀는 나
자신이 편입되어야 할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일깨워주는 교사와 같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삶밖엔 없다. 매일처럼 정해진 계단을
오르는 것이거나 아니면 미끄럼을 타고 한없이 추락하는 것. 작가가 젊은날 겪은 치열한 고민과 방황의 흔적이 소설의 곳곳에 묻
어 있어 작가 입문의 통과의례적인 내면의 과정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김인숙 「바다에서」
"쓰고 싶었다. 절대로, 경찰서장이 사인해달라고 내밀 수 없는 소설을."
J의 이야기를 한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십대와 이십대를 함께 보냈으나 삼십대가 된 이후로는 전혀 만나지 못했
던 J. 그녀는 열일곱 살 때 캐나다에서 전학을 와 젊음의 불면기를 나와 함께하다 어느 날 말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불
쑥 전화를 걸어왔다. 80년대 치열한 투쟁의 시기에 J는 이루어야 할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며 떠나온 애인이 보고 싶어 바다에
가자고 했던 속이 투명한 아이였다. 작가는 정작 J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이십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운동권이었던 80년대에
경찰에 연행되어갔던 체험을 힘겹게 토해내면서 글쓰기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투철한 이념의 무장 없이 낭만으로
만 대했던 운동의 삶 속에서 경찰서장이 절대로 사인해달라고 내밀 수 없는 소설을 꼭 쓰고 싶었다고 작가 김인숙은 토로한다.
80년대에 시대적 고민을 담은 빼어난 작품을 써낸 작가의 당시 절박했던 소설 쓰기의 고민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윤대녕 「은항아리 안에서」
"아침 여덟시에 왔다가 저녁 여덟시에 돌아가는 여인-반나절의 사랑."
감성적 언어와 몽환적 분위기로 특유의 소설적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는 윤대녕은 자전소설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이
작품에서 또다시 서정시와도 같은 아름다운 풍경과 닿을 듯 말 듯한 애절한 사랑의 아픔을 황홀한 이미지로 그려낸다. 소설의 배
경은 항아리처럼 생긴 산봉우리 아래를 두 갈래의 물줄기가 둥그렇게 싸 안고 내려와 생긴 작은 호수가 있는 은항아리 계곡. 얼
음 속의 붉은 집이라고 일컫는 이 계곡을 한 여인이 찾아온다. 아침 여덟시에 왔다가 저녁 여덟시에 돌아가는 여인. 그 여인과
함께 은항아리 안을 돌면서 꼭 반나절의 사랑을 한다. 삶의 정처를 두지 못하고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에 대해 그녀는 사
랑하는 사람 곁에 머물 수 없냐고 투정한다. 떠남과 머무는 것, 세상의 끝에 와 있어도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는 삶에서 사랑이
라 한들 되돌아올 안식이 될 것인가. 그러나 나는 나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누군가가 옆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끝내 버
리지 못한다.
은희경 「서정시대」
"그때 열아홉 살 때 첫키스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내 첫사랑은 완성되었을까."
올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며 그야말로 90년대 대표작가로서 성가를 올리는 있는 은희경의 이 소설은 날카롭고 스피디하고 해
학적인 어조의 문장이라는 그녀 특유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발표 후 97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
은 소설로 뽑히기도 했다.
이 소설의 제목인 서정시대란 화자가 여섯 살에서부터 대학 졸업까지 보낸 인생의 한 시기를 일컫는다. 소설은 머리 속에
동전만한 땜통이 생긴 지금의 나와 그 지나치게 진지했던 서정시대를 살고 있는 나 사이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사춘기와 이
십대에 대한 원형탈모인 나의 진단은 지나친 진지함이 자신의 삶에 과장된 오해와 고지식함을 낳았다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서정적 태도를 지녔던 서정적 나이의 그 시기와 그 시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자의식의 지금 사이에서 은희경만의 독특한
해학이 넘쳐나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화영의 지적처럼 은희경은 우리 소설세계에서 매우 희귀한 해학적 작가임에 틀림없고, 이
작품은 그와같은 그녀의 장점이 온전히 구현된 결정판이다.
최인석 「소설가 최보(崔甫)의 어제, 또 어제」
"글 쓴다는 것은 바퀴 빠진 수레를 밀고 언덕을 혼자서 올라가는 짓"
최인석은 환상적 기법을 동원해 자신이 추구한 글쓰기의 고민을 토로하면서 동시에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곁들이고 있
다. 소설은 소설과 망상의 경계에서 글을 시작한다고 소설 앞머리에 밝히고 있듯이 화자 자신을『양철북』의 오스카에 견주어
서는 가공의 인물과 이미 사라진 역사의 인물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우선 정신분열증 환자 쉬레버 박사를 등
장시켜 프로이드를 비판하며 세상을 바라보고 설명하는 방법은 다양하다고 역설한다. 브레히트를 통해서는 시장(자본주의)과 구
정물의 늪(사회주의) 의 문제를 다루며 세상에서 선택할 게 그 둘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동시대의 시인들을 신선에 빚
대어서는 둘 다 혁명이든 예술이든 선약(仙藥)을 먹고 사는 자들이라 하고, 시므온의 장황한 일생을 통해서는 우리 시대 예술의
메시아를 기다리는 전언을 남긴다. 최인석은 스스로 부끄러움이라는 말로 표현하듯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반성과 문제의식을
나름대로의 이야기틀 속에 정치하게 담아내고 있다.
함정임 「동행」
"새벽이 되자 그의 혼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어둔 허공 속으로 날아갔다."
이 작품은 작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작가 김소진의 특집에 붙여, 그의 문학과 생활의 반려였던 함정임씨가 마지막 투
병의 과정을 진솔하게 쓴 것이다. 고인이 된 김소진씨가 악마의 놀림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몹쓸 병(암 4기)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을 당하는 한 달 보름 동안 함정씨가 겪은 애통한 상황들이 세세히 묘사되고 있다. 처음 병을 확인했을 때의 충격
과 당혹감, 본인에게 병의 진상을 알려야 했을 때의 슬픔과 두려움, 그가 준 마지막 선물인 뱃속의 아이가 병 구완의 와중에 숨
져간 가슴 아픈 사연 등이 읽는 이의 눈시울을 적신다. 함정임씨가 전하는 고인의 마지막은 끝까지 소설 구상의 끈을 놓지 않았
던 치열한 작가정신이다. 그의 혼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어두운 허공 속으로 날아갔지만 고인의 문학은 앞으로도 남아 그 소중한
의미를 후세에 전할 것이다.
구효서 「오남리 이야기3-하기에게」
"난 소설이란 것에 코가 꿰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질질 끌려갔던 것 같애."
우리 시대의 탁월한 이야기꾼 구효서가 최근 자신의 일상과 그 일상 속에서 맞부딪친 소설 쓰기의 고민을 술술 읽히는 명쾌한
문장으로 담아냈다. 콘크리트 독방에 갇혀 있는 너에게 쓰는 편지글 형식인 이 작품은 그가 현재 기거하고 있는 오남리의 일
상을 촘촘하고 세밀하게 그린다. 감옥에 있는 너에게 전하는 형식이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자신과 소설과의 운명적
인 만남에 있다. "내가 소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소설이 나를 선택한 것"이라는 그의 말 속에는 소설가의 운명이란
무당이 되기 싫어 필사적으로 버티다가 종당엔 신내림굿을 받아들이고 마는 신딸의 운명과도 같다는 숙명적 인식이 담겨 있다.
그 운명 탓에 감옥에 있는 너와 자신의 처지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자신의 생활도 "날마다 글 감옥에 갇혀 허우적대고
빌빌거리는 생활의 연속"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