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핍진성이 쏘아올린 시골소설
저자가 그토록 농촌을 들추고 헤집는 연유는 자신의 근본, 즉 부모로부터 기인한다. 그는 첫 산문집 『사람을 공부하고 너를 생각한다』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내가 소설가가 된 것은 어버이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루하고 사소한 농민으로서의 삶을 경이롭고 기억할 만한 사건의 연속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실제로 그의 소설집에는 늘 서너 편씩의 시골소설이 들어 있었고, 이번 책은 열한 편 전부 시골소설로 가득 채워졌다. 이 책은 농촌의 삶을 연민하거나 동경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구현해낸다. 또한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촘촘한 서사에 더한 충청도 사투리 특유의 느릿함은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열한 편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하나같이 흥미롭다. 대개는 멀쩡한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그 사람의 특징을 따서 만든 별호로 불린다. ‘오지랖’ ‘김사또’ ‘팔방미’ ‘해결사’ 등 직관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이름들은 능글맞은 의뭉함을 더한다. 저자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농촌의 핍진성은 마침내 ‘시골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힘차게 쏘아올릴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왜유? 아무것도 안 해줬잖유? 하다못해 지혈두 못해줬잖유? 그리두 지혈해보겄다구 젊은 의사선생님하고 간호사님이 애쓴 값을 쳐드린다고 해도 만 원이면 뒤집어쓸 텐디, 뭐, 5만 원이라고요? 하다못해 진통제 한 알 안 챙겨주고 5만 원이라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슈?” _「코피 흘리며」에서
견디고 버텨야 하는 인생의 굴곡을 해학으로 관통하는 농촌 서사
이 책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은 도시인이 타자로서 바라보는 농촌, 즉 힐링의, 먹방의, 전원의 농촌과 거리가 멀다. 대신에 도시와 별 다를 바 없는 온갖 인물들이 드나드는 세계의 축소판이며, 농촌의 삶을 연민하거나 동경하지 않고 굴곡진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해학을 통해 드러낸다.
이번 소설집의 문을 여는 「우리동네 큰면장」은 역경리 최고 부자 큰면장에 관한 모든 것을 마치 설화 속 주인공 이야기를 하듯 들려준다. 「보일러」는 김사또, 오지랖 부부가 영업사원의 꼬임에 넘어가 보일러를 장만하지만, 한겨울에 보일러가 고장나서 겪는 고초를 넉살 좋게 그려낸다. 표제작 「성공한 사람, 훌륭한 사람」은 “머릿속 골수가 말라버릴” 정도로 책에 심취한 성빈이 ‘책을 많이 읽으면 성공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품고 온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다.
제가 뭘 좀 새로 연구해보려고요. 책을 많이 읽으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하잖아요? 진짜로 그런가 해서. 제 생각엔 별로 그런 것 같지가 않아서요. 박근혜 보세요. 책 많이 읽었으면 그랬겠어요? 최순실도 책 많이 읽은 아줌마 같지는 않고. _「성공한 사람, 훌륭한 사람」에서
「당산뜸 이웃사촌」은 수십 년간 이웃사촌으로 지낸 김사또·오지랖 부부와 공주댁·이장사 부부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나무 열매를 처리하면서 일어나는 시끌벅적한 소동을 다룬다. 「여성 이장 탄생기」는 대통령 선거 못지않게 치열하고 살벌한 역경리 이장 선거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학생댁 유씨씨」는 ‘성깔이 욕쟁이 못지않다’는 학생댁이 역경리 주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제작하는 과정을 담았다. 「살아야 하는 까닭」은 갑작스럽게 마을회관 청소를 담당하게 된 오지랖이 “인생 다 살았다고 생각했는디, 참 아직도 깨닫고 새로 느낄 게 많다는 걸 새삼 깨달은 한 해였네유”라고 말하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선거 때마다 꿩 쫓던 개 된 기분여. 아무나 뽑아도 괜찮은 꿩들은 다 가버리고. 또 뭘 뽑아도 시원찮은 닭 중에서 뽑아야 되는겨?” _「여성 이장 탄생기」에서
「가금을 처분하라고?」는 자주 유행하는 조류인플루엔자 예방을 위해 가금류를 처분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공무원을 묘사하면서, 연민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코피 흘리며」는 코피가 멈추지 않는 오지랖이 한때 지역민의 자랑거리였던 종합병원을 찾지만, 이제는 개인병원 하나만도 못한 시골의 열악한 병원 시스템을 해학적으로 고발한다. 「내게 노래는 무엇이었나」는 대표가수를 뽑기 위해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을 방불케 하는 역경리 가수선발대회의 긴박한 현장을 맛깔나는 언어로 구현해낸다. 「농사꾼이 생겼다」는 역경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도시로 떠난 흥부네 아들 철규가 어느 날 홀연히 돌아오는데, 도회적 삶에 실패한, 고향 시골에도 쉬이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진솔하게 그려낸다.
“그렇다니께유, 저 새끼들이 진짜 나쁜 놈들여. 일주일 전인가는 맹장 터진 사람이 왔는데 그거를 소화불량이라고 소화제만 줘서 보냈디야. 아무리 레지던트라고 맹장 하나를 못 보냐고. 배가 뒈지게 더 아파서 다시 갔더니 그제서 한다는 소리가 큰 병원으로 가보랴. 그런 무책임한 놈들이 어딨냐고.” _「코피 흘리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