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이제하의 세번째 소설집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198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이제하의 세번째 소설집 『용(龍)』을 표제를 바꿔 새로 펴낸 것이다. 출간 당시 함께 실려 있던 단편 「밤의 창변(窓邊)」은 장편으로 묶이는 관계로 이번 소설집에서는 제외되었고, 새롭게 작가의 수정을 거친 「눈〔眼〕 이야기」 「양말」 등 모두 9편의 단편이 묶여 있다. 창작 연도순으로 간행되는 소설전집에서 두번째 소설집 『돌의 사막, 풀의 국경』에 앞서 세번째 소설집을 먼저 출간하고자 한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작가는 이 소설집에 강한 애정을 품고 있다. ‘광기의 미학’과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작가 이제하가 새로운 사실주의의 뿌리를 뻗어내리고 샤머니즘의 우물을 길어올려 꽃피운 수작인 「용」과 영화로도 잘 알려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회화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등장인물의 내면의 이미지를 집요하게 쫓아가는 「소렌토에서」와 「눈 이야기」, 사회 지도층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풍자한 「강설(降雪)」 「풀밭 위의 식사」 「양말」, 비루한 현실을 연명하려 애쓰는 하층민의 삶을 희화화한 「권투」, ‘미친 화가’를 통해 광기의 미학을 끈질기게 탐문하는 「굴절」 등 이 소설집에서 우리는 이제하의 문학적 특질을 선명히 드러내는 보폭 큰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우리 소설사의 불멸의 고전이 된 환상적 리얼리즘의 정수(精髓)
이 소설집의 모두에 실려 있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작가에게 이상문학상(제9회, 1985년)을 안겨준 작품으로 문단의 환호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 화제작이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이 작품을 가리켜 “소설의 모범 답안으로 되돌아온 것”이라고 평하며, 우리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 틀인 분단·이산문학을 우리 소설의 전통이자 성과인 샤머니즘적 원형으로 탁월하게 창조해냈다고 평가한다. 작가가 수상 소감에서 “그들이 즐겨 쓰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우선 한 발 물러서서 같은 방법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술회했듯이, 이 작품은 이제하의 작품세계를 다른 한편으로 확장시키고 지탱하는 또하나의 기둥이 되었다. “분단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소설적인 돌파구의 하나”라고 극찬받은 「용」 역시 광포한 이데올로기와 뒤틀린 가족관계, 광기와 무력감으로 허리 꺾인 개인의 고독을 핏빛 선연한 샤머니즘으로 승화시켜낸다. 우연히 고향을 방문하게 된 주인공의 여정이 살인범 아들을 둔 친구의 삶과 얽히면서 ‘용신제’라는 환각적이며 토속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이 소설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훌쩍 넘나드는 이제하 소설의 개성적 특징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환상적 리얼리즘 문학의 한 절정을 이룬다.
부조리한 일상을 구원하는 심미성의 세계
문학평론가 백지연은 “이제하가 보여주는 기묘하고 그로테스크한 세계가 본질적으로는 고도의 심미성과 예술성을 그리워하는 낭만주의에 잇닿아 있음”을 주목한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용」과 같은 작품의 주인공은 어떤 빛나는 이념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들이 아니다. 여행 동기는 모호하기 이를 데 없고, 이들의 여정은 끝인지 시작인지 모를 애매한 성격을 띤다. 어느 곳에도 머무를 수 없는 낭만적 방랑인. 그의 소설은 부조리한 세계를 하염없이 헤매는 자의 고독감을 절실하게 보여준다. 김화영 교수는 이를 가리켜 “의미는 ‘관계’에 의해서 생성된다. 그런데 나그네의 고독은, 우리의 삶 그 자체인 근원적 고독은 ‘관계’를 차단하고 의미를 무(無)로 돌린다. 의미의 생성과 무화(無化) 사이에 생기는 긴장감, 혹은 의미의 행려(行旅), 이것이 바로 이제하의 불확실의 아름다움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비극적인 현실에 저항하면서도 좌절당하고 다시 끝없는 여행을 떠나게 되는 고독한 인간들을 그려내는 이제하는 비천한 일상을 견디고 혹은 그것을 박차고 뛰쳐나올 수 있는 힘을 예술에 실어주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일그러진 현실과 기괴망측한 일상의 세태를 포착하면서도 그 밑면에 미적 감성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간직한다. 그것은 일상을 날아오르고 초월하고 견뎌나가는 힘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이제하의 소설이 보여주는 실험적 면모들이 본질적으로는 모더니스트의 정교한 미의식에서 도출된 것이라 볼 수 있는 점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관습적 규범과 끊임없이 싸우는 영원한 청년 작가
이번 소설집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몽타주 형식의 서술 방식이나 돌연한 장면 전환, 강렬한 회화적 이미지와 영상적 상상력은 오늘날에 이르러 그 빛을 더하거니와, 새삼 그 선각자적 예지에 감탄하게 한다. 주제와 형식에서의 분산과 해체, 집중과 상승이 중층적으로 변주되는 이번 소설집에서 우리는 부조리한 일상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자유로운 정신이 보여주는 도저한 심미주의의 경지를 발견한다. 이제하의 문학세계는 관습적 규범과 끊임없이 싸우는 작가를 찾는 독자만이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선물이다.
이제하 소설전집을 펴내며
후배작가들의 영감의 원천, 우리 시대의 르네상스적 예술가
우리 문학사에 ‘예술가소설’이라는 새 장을 열며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온 작가 이제하. 시인, 소설가 등 여러 문인 후배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예술적 감수성의 세례자로서 값진 영향을 준 우리 시대의 장인. 시·소설·그림·영화평론·작곡 등 장르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작품활동을 통해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르네상스적 면모를 보여온 그는 1957년 문단에 나온 이후 전통적인 소설작법과 관습적인 서술방법을 과감히 깨트리고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개인의 내면을 깊이 천착한 작품세계를 꾸준히 선보여왔다. 특히 그의 소설이 추구한 ‘환상적 리얼리즘’과 ‘광기(狂氣)의 미학’은 여전히 한국문학사의 소중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제 시대적 아픔과 존재론적 고뇌를 함께 끌어안음으로써 우리 소설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킨 이제하 소설의 정본을 독자 앞에 내놓는다. 그의 30여 년의 문학 인생을 결산하는 『이제하 소설전집』은 그가 쌓아올린 문학적 위업과 도저한 예술혼을 선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문학동네는 장편소설 『열망』, 소설집 『초식』 『기차, 기선, 바다, 하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에 이어 목록순에 따라 전권을 지속적으로 펴낼 예정이다. 1 소설집 『초식 草食』―출간 2 소설집 『기차, 기선, 바다, 하늘』―출간 3 장편소설 『열망 熱望』(전2권)―출간 4 소설집 『돌의 사막, 풀의 국경』 5 소설집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출간 6 장편소설 『유자』 7 장편소설 『진눈깨비 결혼』 8 장편소설 『모래틈』 9 장편소설 『파락호의 수기』 10 장편소설 『선생님』 11 소설집 『울트라마린의 청춘』 12 짧은소설 『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