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적 종말의 표정을 탐색하는 시적 열정
1995년 「오리엔트 특급―리얼리즘 흥망기」 「사라진 길―책에 대하여」 「시간 앞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후 줄곧 묵시록적 종말의 표정을 탐색하는 데 시적 열정을 바쳐왔던 서동욱 시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다. 현재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서동욱 시인은, 인식론적 깊이를 지닌 의식과 안목으로 현상을 관찰하고 그 이면의 뿌리까지 해석해낼 수 있는 재능을 이번에 출간한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준다.
시인 서동욱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강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했다. 현재 벨기에 루뱅 대학 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1995년 『세계의 문학』과 『상상』 봄호에 각각 시와 평론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역서로 『칸트의 비판철학』 『프루스트와 기호들』 등이 있다.
지독한 종말의 언어와 종생의 상상력
시집을 펼치면 “종말의 표지화”가 펼쳐진다. “심판이 시작되자 순식간에/수챗구멍마다 가득 차는/영혼들”(「서시적 종생기」)의 모습이 그로테스크하게 읽는이의 눈을 찌른다. 뿐만 아니다. “여자의 뱃속엔 풀 한 포기/살아남지 못”(「봄」)한다. “장기(臟器)들이 환해지고 꽹과리 소리 몸 속/어디든 꽉 차며, 펑 산산조각 나/나 피안개로 흩어졌네”처럼 인간의 몸은 “흔적없이 사라지는 삶”(「생은 다른 곳에」)의 형국이어서 그야말로 종생을 알리는 구제적인 표지에 다름아니다.
시인 서동욱의 종생기는 이런 종말의 이미지와 이야기들로 출렁거린다. 그가 보기에 세기말의 인간은 죽음으로 산다. 죽음은 생의 도처에서 삶을 압도하는 큰 타자의 권력을 행사한다. 낙태, 자살, 살인, 식인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들이 삶을 가로지르며 교란한다. “말은 후회로 더럽혀지고” “피둥피둥한 돼지들의 이야기”(「서시적 종생기」)만 가득한 세상에 대해 그는 아주 지독한 종말의 언어와 종생의 상상력으로 대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시집은 내용으로 보아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시적 종생기」에서 「종생기」까지의 종생록이 한 권이라면, 마지막 시편 「인간의 추억과 자연의 그림」이 또하나의 권을 이루고 있다. 이 시는 종생록의 시편들에서도 부분적으로 보였던 반성적 사유와 자기 부정의 정신이 새롭게 탄생을 본 결과물이다.
서동욱의 시는 현란한 포즈의 언어로 이미지의 교란만을 일삼는 일부의 시적 경향에서 훌쩍 비껴나 있으며, 매우 실험적인 인식의 포에지에 값한다. 시와 예술에 관한 아방가르드적 열정이 세계 인식의 정당한 방법과 깊이와 조응할 때 빚어질 수 있는 시의 새로운 스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