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대정신은 북방정책이다"
"나는 시대정신에 뒤처졌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앞서 갔던 것이 탈이었다."
"나는 시대정신을 이끌어가야만 했던 사람이다."
시대정신(자이트 가이스트)구현을 위해 몸부림친 한 정치가의 야망과 사랑을 다룬 장편소설 『활은 날아가지 않는다』가 출간되었다. 신예작가 조용준의 문단 데뷔작인 이 소설은 가난한 술주정 뱅이의 자식에서 정계의 떠오르는 별이 되기까지, 한 정치인이 걸어왔던 파란 많은 삶의 진실을 찾아가는 야심 찬 작품이다.
이 소설은 90년 초라는 당대(當代)현실에 대한 작가의 세상읽기다. 그런 만큼 정치판을 가까이서 지켜본 자만이 쓸 수 있는 생생한 현장감과 날카로운 시각이 돋보인다. 또한 이 작품이 획득한 소설적 성취도는 작가의 역량을 신뢰케 하는 든든함을 보여준다.
시대정신구현을 위해 몸부림친 한 정치인의 야망과 사랑의 오디세이
80년대는 가히 민중의 시대였다.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던 이들이 80년 광주사태를 계기로 역사의 주인으로 복권되면서 만개하기 시작한 민중은 모든 예술의 주어로 그 맹위를 떨쳤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 위주의 사회변혁을 위한 거대담론도 동서독 통일과 소련의 붕괴라는 세계사적인 지각변동과 문민정권의 등장이라는 대내적인 변화의 역학관계에 의해 서서히 묽어지기 시작했고, 문학도 예외일 수 없었다. 90년대 들어서, 서사의 중심이 80년대의 큰 목소리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이동하면서 소설이 개인의 독백 내지 고백으로 도배질되는 심근 경색증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볼 때, 신예작가 조용준의 『활은 날아가지 않는다』는 작품의 완성도 여부를 떠나 일단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이 작품이 우리 문학의 소외지로 방치되어 있던 90년대 촐는 격동기를 문학의 장으로 끌어들였다는 점과 민중의 대척점에 선 권력의 상층부를 감히(?) 소설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방정책, 그것은 한국의 시대정신이다.!
시대정신이란 "세상의 지배적인 조류가 무엇인지를 미리 알아내고 국가 이익을 위해 그 조류를 실행에 옮기는 정신"(헤겔)을 말한다. 주인공 나정주는 자신을 "시대정신을 이끌어 가야만 했던 사람"이라고 굳게 믿으며, "북방정책"을 "한국의 시대정신"이자 자신의 "필생의 과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믿음은 메아리가 되지 못하고 역사의 허공에 흩어지고 만다.
이 소설은 나정주의 권력으로부터의 이탈에서 시작한다. 그런 가운데 그 영욕의 삶이 어떻게 배태되었고 전개되었는지를 거시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망하면서 보다 객관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것은 4 13호헌조치, 6 29선언, 90년 1월 보수대연합, 내각제 개헌, 북방정책 같은 실제 현대정치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으로 해서 한층 실감과 의미를 더한다.
나정주가 권력의 중심을 향해 질주할 때, 그는 박대통령 시해 사건 담당검사, 국보위 참여, 청와대 정무수석 특보, 안기부 특보, 대검찰청 검사를 거쳐 정무장관에 오르는 초특급 출세가도를 달린다. 그리곤 사실상 여권의 실세 장관이 된다. 그는 이미 4 13호헌조치와 6 29선언의 시나리오 작성가로, 90년 1월 보수대연합이라는 경천지동할 깜짝쇼의 기획가로, 내각제 개헌 주장과 북방정책의 선두주자로 종횡무진 활약해서 여권의 떠오르는 별로 입지를 굳혀온 입장. 게다가 북방정책하면 곧 그의 이름을 떠올릴 만큼 그는 북방정책의 주도자였다. 또한 북방정책만큼은 그가 참여했던 정권이 후세에도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과업"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필생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3당통합 후 여당의 대표와 방소(防蘇) 결과를 놓고 일으킨 갈등은 결국 장관직 사표로 이어진다.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외유를 결심한다. 이로써 그의 꿈은 영원히 역사의 미아로 남게된다.
한편 나정주의 주변에는 정부(情婦)인 톱탤런트 강선영, 대기업의 회장 김상호, 그의 처 민은실, 나정주의 처 박경숙 등이 권력의 후광을 향한 치열한 로비 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나정주와 강선영의 밀애 현장을 추적하는 맹렬 여기자 채연주, 이를 도와주는 홍콩 특파원 이동명 기자, 채연주의 연인인 고(故) 남정일 기자 등이 나정주와 권력의 이면을 파헤친다.
문학의 장으로 편입된, 90년대 초와 권력의 상층부
"나는 시선을 뗄 수 없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매혹시키는 당대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당대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 느끼는 부채 의식, 빚 때문이리라. 1980년 서울의 봄, 그리고 광주(光州)만이 당대는 아니다. 이 못지 않게 격동의 세월이었던 90년대 초반에 대해서도 80년 광주 못지 않게 주목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문학적으로! 소설로!"라는 작가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우리 문학의 소외지였던 90년대 촐는 시대의 격동기를 문학의 장으로 끌어들였다는 점과 그동안 소설의 주 소재였던 민중이 아니라 그 대척점에서 한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권력의 중심인물과 권력의 이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은 이 소설의 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수리남 사태를 둘러사고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 전개되는 숨막히는 로비 활동, 90년 1워르이 부수대 연합(3당통합), 내각제 개헌, 북방정책, 3당통합 대표와의 갈등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비화를 녹여, 80년대에서 90년 초에 걸친 우리 시대의 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곧 우리의 현대정치사이자 지난 시대의 부끄러운 속살이다. 그런 가운데 북방정책이나 보수대연합에 대한 긍정적인 인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우리 사회의 특정사건을 재현하고 있는 인물 설정이 그렇다. "이 소설은, 분명한 소설이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거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알레고리가 소설의 형식/내용보다 우위에 서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허구적 상황을 넘어 현실 재현이라는 혐의를 떨구지 못한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한 번쯤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서 한 인간을 바라볼 것과 보다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이해의 터전 위에서 평가할 것을 설득력 있게 요구한다. 이는 풍부한 읽을거리와, 차근차근 쌓아올린 복선, 그리고 스릴 넘치는 전개방식에 실려 시종일관 소설의 재미와 함께 독서욕을 부추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