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自省)의 깊이, 훼손되지 않은 강인한 시정신, 마종하 시인의 네번째 시집
가난하고 힘없는 소시민의 일상 속에서 염결한 삶의 진실을 포착해온 마종하 시인의 네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시인이 자서에서 “나를 떠나는 풍물기, 나를 버리는 종교 의식, 그것은 자기 위안의 가식이다. 완전히 떠나지 않고 실제로 버리지 않는, 그 숱한 헛꿈들이 늘 어지럽다”며 자신의 시관(詩觀)을 밝히고 있듯이, 이번 시집에 담긴 64편의 시들에는 그 동안 시인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치열한 자기 반성, 왜곡된 현실에 대한 비판, 그리고 진정한 삶에 대한 모색이 친근하면서도 거침없는 어조로 표현되어 있다. 『활주로가 있는 밤』은, 온몸으로 활주로를 질주해야 마침내 이륙하는 비행기를 환기시킨다. 다시 말해 전속력 질주라는 치열한 삶을 배제하는 형식적 초월을 비판하고, 현실을 끌어안고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포월(包越)의 미학’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왜곡된 현실과 맞서고자 하는 염결한 시심(詩心)
어린 네 자매의 자살 사건을 소재로 비극적 삶의 한 단면을 제시하고 있는 표제작 「활주로가 있는 밤」은, 절망적인 현실을 마주한 시인의 쓰라린 자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가난이 꿈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살아가는 시인은 어린 네 자매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뉴스 앞에서, 탈현실(초월)을 은유하는 활주로를 제시한다. 그 활주로는 침묵으로 시끄러운 시대의 ‘대낮’을 가로지른다. 강팍한 현실과 활주로를 대비시키는 시인은, 그러나 네 자매의 죽음이나 활주로 그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다. 현실(네 자매의 비극적 죽음)과 이상(활주로, 이륙, 초월) 사이에서 팽팽한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다. 그의 시는 바로 여기에서 태어난다.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정치가, 학자, 사이비 성직자, 거짓 시인 들에 대한 준열한 비판도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장악하는 시적 태도에서 가능하다. 시인은, 허위로 가득 찬 현실과 타협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립되어 결벽성을 지키고자 하는데, 이같은 순수한 삶에 대한 희구는 잘린 나무둥치에서 날아오르는 ‘순백의 새’의 이미지로 나타난다.(「강선사 가는 길」)
하지만 시인의 고립은 단순한 도피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의 염결성이 도피로 끝난다면, 그의 시는 현실에 대한 응전력을 확보할 수가 없다. 현실에 오염되지 않기 위한 방법론으로 고립을 선택한 시인은 ‘말가죽나무’처럼 강하고 끈질긴 속성을 무기로 삼아 현실을 지배하는 위선과 대결한다. 만일 시인이 고립의 끝에서 주술적 형이상학이나 몽상적 이기주의와 손잡았다면, 소외된 사람들, 어눌한 존재들에 대한 뜨거운 연대는 불가능했으리라. “혼자 보는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5. 낙서, 『순교 일기』에 의한」)라는 시구에는, 소승적 깨달음을 단연코 거부하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결연하다. 이 지점이 바로 시인의 ‘포월의 시학’이 태어나는 자리이다. 타락하고 거짓된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순수한 세계를 추구하지만, 결코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빛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거짓 없는 천진성이야말로 시와 시인의 기본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해 바닷가에서, 시인에게 순수의 표상인 시인 천상병을 떠올리며 “도피의 헛꿈은 헛꿈일 뿐이다” “겉도는 몸짓은 위선이다. 위선이다”라고 부르짖는다.(「동해에서 본 천상병」) 그릇된 것을 그릇되다고 말할 수 있고,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이 천진성에서 비롯한다고 마종하 시인은 믿고 있다. 이 천진성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과 시대의 안팎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천진성에 대한 신랄한 옹호와, 그 천진성에서 나오는 자기 반성과 냉철한 비판이 ‘삶의 진실과 만나는 시쓰기’의 요체이다.
마종하 시인의 내면에는 순결한 시에 대한 염원과 속악한 현실에 대한 절망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통하여 모든 거짓과 위선의 껍질과 그림자를 거두어내고 정직한 나, 순정한 존재로 돌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단련하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거짓 없고 깨끗한 세상은 이 시집의 첫번째 시 「마음 붙일 곳」에서 명징한 바다의 이미지 속에 담겨 있다. “바다를 돌아/산맥을 돌아/더 갈 곳 없는 작은 주점의/헐벗은 술잔”이 외롭고 고단한 그의 ‘마음 붙일 곳’이다. 하지만 헐벗었기 때문에 그 술잔의 술은 투명해지고, 마침내 물방울이 되어 흩어진다. 저 작고 헐벗은 술잔 속에서 시인은 “산보다 큰 산,/바다가 낳는 바다의 바다”를 발견하고 거기에 마음을 붙이는 것이다.
시력 30년이 넘는 중견 시인의 네번째 시집인 『활주로가 있는 밤』은, 우리 시대에 시와 시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근래에 보기 드문 ‘무거운’ 시집이다. 시대 현실이라는 거대 담론을 외면한 채, 내면화의 길로, 혹은 대중문화의 ‘소비자’로 치닫고 있는 우리 시단에 둔중한 울림을 자아낼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