굼뜨게 제 길 가는 사람들의 가슴 짠한 이야기,
윤중호 산문집 『느리게 사는 사람들』출간
윤중호 시인이 사람 냄새 가득한 산문집 『느리게 사는 사람들』을 펴냈다. 시인 스스로 무난하지 못한 삶이었다고 고백하는 지난 세월, 세상의 뒷골목에서 만난 별종의 사람들 이야기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자리에서 느릿느릿 굼뜨게 자신의 길을 가는 외고집 인생들의 이야기는 시인의 걸쭉한 입담에 실려 시골 잔치마당의 풍성함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들의 삶은 대개 화려함이나 재바름과는 무관하지만 자기만의 눈과 보폭으로 세상과 마주서는 당당함에서 느리지만 속깊게 환하다. 그 느리지만 속깊은 환함이 앞으로만 몰아치는 세상의 속도를 반성케 하는 자리, 그것이 『느리게 사는 사람들』의 미덕이다.
“한 사람의 살아온 내력이 그가 적어낸 학력, 경력이나 적금통장에 의해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닐 것이고, 그 사람이 만들어온 이야기가 사실은 그 사람의 인간됨을 판가름한다는 게 철딱서니 없는 나의 소견이다”는 시인의 말처럼 이 책에는 자신만의 보폭으로 세월을 헤쳐온 사람들, 그들의 묵은 이야기가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 시인의 의뭉스러운 입담이 짐짓 숨기고는 있지만, 가슴 짠한 대목들을 피해가기가 그리 쉽지 않다.
강홍규 이문구 신경림 천상병…… 푸짐한 이야기꾼에서 외길 장인들까지,
느리지만 진정 신명나는 삶의 깊은 자락들!
『느리게 사는 사람들』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뒷골목 사부에 대한 추억’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시인과 특별한 교분을 나눈 문인들로, 소설가 강홍규, 이문구, 김성동, 송기원, 시인 신경림, 천상병, 윤재철, 평론가 김종철 등이다. 좀체 듣기 힘든 흥미로운 문단 이면사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글판 사람들의 특별할 것 없는 인간적 모습은 바로 그래서 그들 문학의 엄정함을 더 강렬하게 환기시키며, 문학과 인생에 대한 귀한 성찰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간다.
‘2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3부 묵은 맛을 살리는 사람들’에서는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한 경지를 이루어가고 있는 외길 장인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도자기장이, 농사꾼, 재야 디자이너, 소리꾼, 유기 장인, 자수가…… 등등 구석진 곳에서 성심껏 겸손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진정 소중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월에 곰삭아 깊은 정취를 풍기는 우리 주변의 사물이나 풍습도 함께 어울려 있다. “우리가 버린 우리의 마음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기도 포천 가는 길가의 궁상맞은 찻집 하나, “낯설지만 친근한 느낌이 드는 복잡한 표정”의 장승, 살마다 꽃을 새기는 마음씨로 인해 대발 사이에서 자태를 뽐낼 수 있었던 ‘한국의 문살’, 탈춤, 옹기, 짚, 김치 등을 통해 묵은 장맛의 우리 마음자락을 집어내는 시인의 눈은 깊고 따뜻하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곳에서 전혀 못 어울리는 일을 하고 있는 별종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신기해서 멀쩡하게 지나가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한번 더 빼꼼 들여다보고 갸웃거리게 만드는 사람들로, 한편으로는 아침부터 해장술 생각이 나게 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짠해지기도 하는데, 말하자면 다들 휩쓸려 가는 세상판에서 그나마 어기적거리며 굼뜨게 제 갈 길로 가고야 마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 본문 중에서
나는 참 운이 좋다. 또래 친구들처럼 무난하게 살지 못하고, 사연 많고 가슴 저리고 아프게 목을 외로 꼬고 떠돌며 살았지만 그렇게 아플 때마다 운 좋게도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정규 학교 선생님들이나 책에서 만날 수 있었던 여러 스승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을 맥없이 떠돌다 만난 나의 ‘뒷골목 사부님들’은 또 얼마나 많으신가. 나는 그분들에게 우리 모두가 안쓰럽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중생이라는 걸 진즉 배웠다. ―‘책을 펴내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