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의 시원을 찾아 회귀하는 고요한
시의 불꽃
3년 전 시를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갔던 시인 하종오가 "유폐시편(幽閉詩篇)"을 들고 세속도시로 입성했다. 이번에 출간되는 시집 『쥐똥나무 울타리』는 시인이 "1991년 한 해, 사람 만나는 일이 싫고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실어서 서울과 문학으로부터 자신을" "강화섬"에 격리시킨 채, "나날의 생과 사색"(「自序」)으로 일궈낸 유폐의 시들을 담고 있다.
시인은 그동안 전통적인 서정시와 이야기시, 그리고 극시와 굿시 등 다양한 형식의 실험을 통해 우리 민중, 특히 농민의 정서를 배어나게 노래해왔다. 그런 그가 시를 버리고 강화도에 은거하며 형상화한 이번 시집은 사상의 강물을 넓혀감과 동시에 깊이가 더해진 사색의 시편들로, 떠남과 귀환 사이에 길항하는 마음의 편리들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것은 강화섬으로의 떠남 (제1부) - 강화에서의 생활(제2부) - 참회(제3부) - 백운거사 이규보옹과의 만남(제4부) - 자신의 심경(제5부) 등 전체 5부로 편집되어 있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시쓰기에 대한 문제를 궁구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장착하고 있는 시인의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한 내적필연성이 소진되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시인은 그동안 시(詩) 우물 속의 개구리였던 자신을 돌아보며 존재의 집이었던 시 우물에 환멸을 느낀다. 그런 가운데 시인은 시로부터의 도망을 결행한다. 그는 바다 건너 강화섬에서 새로운 삶을 닦는다. 그곳에는 높낮은 야산과 크고 작은 다랑논, 오래된 이규보의 무덤과 초라한 공동묘지, 시커먼 갯벌과 밀물썰물, 노을녘이면 불어오는 서풍이 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채소를 가꾸고 농사를 짓는다. 시인은 짐짓 시에 대해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시인의 내면에는 시의 정체성에 대한 뜨거운 질문이 웅크리고 있다.
제1부는 강화섬으로 떠나는 시인의 심경과 강화 경관을 묘사한다. 시인은 "염하를 건너오면 / 뭐가 있을 것 같아서 섬으로" 왔지만 자신의 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시쓰기를 포기했던 건 / 이념의 열정도 창작의 고통도 상투성도 아니라, / 끝없는 자기모순과 시적무능 때문이었다."(「서쪽섬, 동쪽뭍」)고 지난날을 반추한다. 그리하여 젊은 날 "나의 발 등에 꽂혀 있는 칼을 이제 뽑아 던지고, / 이곳, 피의 흔적을 찾아 문질러 지무며, / 저곳, 뭍으로 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이 다시 뭍으로 향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시인을 담금질한 후의 일이다.
제2부는 강화에서의 전원생활을 담고 있다. 시인으로서가 아닌 자연인으로 돌아간 시인의 소박한 삶이 담겨 있다. 강화읍에서 두 시간마다 다니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시인의 집은 쥐똥나무울타리가 있는 곳이다. 시인은 트럭 두 대로 싣고 온 세간을 이곳에 부려놓고, 나무와 풀과 무생물의 마음까지 읽어가며, 밭 서마지기에 서툴게 농사를 짓는다. 그러나 "세속도시를 떠나 강화섬에 살림가재를 부려놓"을 때, 그는 "풀꽃과 곡식으로 연명하기를 꿈꾸었지만"대지는 그의 손길을 차갑게 거부한다. "스스로 깨끗한 몸과 참된 영혼으로 투항"(「강화도 행각」)하지 않은 시인에게 대지는 "깨끗한 눈물"(「넙성리」)을 흘리게 한다.
이 눈물은 시에 대한 존재론적인 물음에 시달리는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시인에게 참회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그래서 제3부는 "무얼 하러 여기 왔는가." "나 무얼 더 찾으려고 예 왔는가." 자문 속에, "나머지 남은 내 반평생은 / 거친 들을 지난 햇빛과 바람에 젖어 깊어가는 강물처럼 / 깨끗한 사람의 땅에 길이 닿고 싶어라"(「염하에서」)는 토로 속에,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바라는 시인의 참회의 긴 그림자를 보여준다.
이러한 참회는 『동국이상국집』의 저자이자 시인인 백운거사 이규보의 혼백을 만나면서 내적으로 심화된다. 제4부는 이규보옹에게 시의 길을 묻는 시인의 가열찬 넋두리에 바쳐진다.
시인은 "왕정시대에 옹께선 산야에서 헐벗은 백성을 위해 슬피 노래하셨지만 자본주의를 살면서 저는 주린 가슴을 읊지 못하였습니다."라며 이?옹은 "무신정치 아래서 왜 시를 쓰셨는지 왜 시로써 벼슬을 구하고 문장으로 국구하려 하셨는지"(「이규보옹을 뵙고 싶어서」)라고 묻는다. 이는 곧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붓을 놓고 적막한 술잔 속에 앉아서 흰 수염만 쓰다듬고 계시는 백운거사는 묵묵부답이다. 이렇게 시인의 넋두리를 경청하는 이규보옹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늙은 이규보 젊은 이규보 저승 이규보 이승 이규보 등의 이규보는 시인의 내면을 다채롭게 분광하는 스펙트럼이다. 그리고 젊은 이규보나 이승 이규보는 늙은 이규보나 저승 이규보에게 답하는 시인 자신을 지칭한다. 늙은 이규보는 절음 이규보에게 "이 강화섬을 떠나지 않겠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자네와 내가 혼 바쳐 이룩해야 할 시는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하네." / 저 대지가 만물을 탄생시키고, 적막과 환희가 저 대지를 둘러쌀 때 "자네 시를 쓰지 않겠는가."라고 다그친다. 이에 대하여 젊은 이규보는, "지난 2년 동안 논밭 갈았더니 / 잡곡과 채소가 저의 스승이 되어 저를 구해주었습니다."(「백운거사께 가는 길」)라며 긴 여운을 남긴다.
제5부에서는 이러한 자신의 심경(心境)을 정리한 심경(心經)연작이다. 심경은 일상적인 용어가 아니라 불교용어,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준말로 삼라만상의 모든 본질을 깨닫는 완전한 지혜 혹은 지혜의 완성이라는 의미이다. 심우도처럼 시의 소(牛)를 찾아가는 시인의 심정은, 지금까지의 사실적인 정황에서 벗어나 완전히 추상화되어 표현된다. 앞의 각 부의 이야기를 끌어안으면서 관념 속으로 도약하는 시의 아름다움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강화도행각을 정리한다.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쥐고, 시에 대한 존재론적인 물음을 궁구하는 시인의 집요한 성찰은 마침내 자신의 삶 전반에 대한 재고와 그동안 일궈온 시농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시인의 구체적 생활로부터 출발하여 점차 내면으로 파고들면서 추상화 경향을 띤 채, 시인에게 시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재인식하기까지의 지난한 여정과 내면을 진솔하게 보여주며 진행된다.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의 시편을 떠올리게 하는 이번 시집은 마치 한편의 전원풍경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쓰린 아름다움이다. 그 속에 시의 정체성을 궁구하는 시인의 생활이 섬처럼 떠 있다. 시인의 고독과 눈물과 성찰이 켜켜이 바람치고 있다. "쥐똥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나의 농가와 돈사와 서 마지기 밭에서"길어올린 이 시집이 보여주는 시인의 치열한 성찰은 마치 태풍 속의 고요를 보는 듯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참회는 나무에 잎이 없는 동안 계속되다가 또 나무가 움트면서부터 새로 시작될 것이다."(「초겨울」) 결국 먹구름 뒤의 달빛을 찾아가는, 이같은 메시지 채굴은 이 시집을 사뭇 희망적이게 한다. 이 희망 속에서 우리는 새롭게 도약할 하종오 시의 행보를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