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살같이 맑은 그리움의 시
불란서 유학중인 시인의 모국어에 대한 사랑,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집이 출판되었다. 그리움을 노래 한 시들은 많지만 대체로 상투적인 이미지들을 벗어던진 시는 흔하지 않다. 염명순 시인의 첫 시집 "꿈을 불어로 꾼 날은 슬프 다"는 그리움이 시에서 얼마나 다양한 모티프가 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들로 묶여 있다.
시인은 새벽하늘에 샛별 하나 떠 있는 것을 보고도 그리움을 떠올리고, 시름에 겨운 이 땅의 나무들과 풀들을 생각하고도 그리 움에 사로잡힌다. 그리움은 항상 애틋한 감정만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때로 우리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낳기도 하는데, 그 비판조차도 끈끈한 애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그리움으로 되돌아간다. 여성들의 수난의 역사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환원하며, 봄날에 온갖 쓰레기들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고는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꿈에 부푼다. 그러 기에 그의 시는 햇살이 그리움으로 내리비치는 아침의 노래이고, 그의 시가 섬기는 나라는 그 햇살에 눈부신 나라, 사람이 사람 을 섬겨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이다.
시인은 먼저 예쁘고 순하나 힘있는 말들을 부려 그리움의 씨앗을 심는다.
바람이 불면
그리움의 나무로 흔들리는
작은 씨앗을 심으련다
"아침 노래" 중에서
염명순 시에 나타난 그리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고 또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다. 조용한 산사에 핀 수국을 그리워하며("수국이 피는 곳"), 감꽃이 만발한 고향집 뜰을 그리 워하고("가족사진"), 혁명의 몸부림으로 싸워나가는 서울의 눈 내리는 거리를 그리워하며("눈사태"), 가족들에게 안부전화로 만 듣는 모국어를 그리워한다("꿈"). 그 그리움의 힘으로 그는 담담하고 아름답지만 진한 향기는 없는 수국꽃과 같은 마음을 부려 어여쁘게 고향을 건설한다. "꽃게" "가족사진" "김장" "비 그친 뒤"의 풍경들은 한결같이 마음이 순한 자의 마음결 이 작은 물살처럼 추억으로 흐르고 있다.
그리움을 모티프로 한 염명순의 그리하여 추억의 성을 찾아나서는 자취를 보여준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이 어 느 날 갑자기 낯설어질 때, 현재의 삶의 자리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그 흔들리는 삶의 자리에서 시인은 일탈의 욕망을 간직하게 된다. “나는 내 인생을 여행하지도 않았으며/정박하지도 않았”("국경을 넘으며")던 것이다. 그 욕망은 그의 시에서 현재의 삶의 자취를 지워버리는 도구로 ‘잠』이라는 이미지를 끌어들이게 된다. ‘잠』은 일차적 으로는 현실 부정이나 망각의 역할을 하지만, ‘꿈』을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세계로의 여정을 마련해놓는 역할을 한다. “낯선 곳 에서 하룻밤/가숙의 성긴 잠 속으로/별빛은 쏟아져 베갯잇에/잔잔한 꽃무늬를 수놓는다/그 꽃길을 따라가면 어린 시절”("낯선 곳에서")의 꿈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잠이 꿈과 어울릴 때, 잠의 세계는 유년 시절과 자연의 세계로 향한 여정을 마련해놓는다. 그 여정 속에서 드러나는 세계의 모 습은 고요함이나 슬픔과 같은 분위기를 갖는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의 유년 시절과 자연은 여성성으로 회귀하는 속성을 드러낸다.
하나 둘 불을 켜는 어머니의 집에서
아직 움트지도 않은 아이가
우비를 벗는다
|"비 그친 뒤" 중에서
아이가 돌아가는 곳, 그리고 일상의 삶이 귀환하는 곳에 여성성의 품이 마련되어 있다는 자각이 시인의 유년 시절과 자연에 대 한 추억의 여정 속에 고요함과 슬픔의 분위기를 준비한 것이다. 그러한 여성성의 품은 “참나무장작을 아궁이에 넣으면 금세 환 하게 타오르는 유년의 저녁”("겨울 이야기")이라는 구절 속에 마련되어 있는 ‘아궁이』의 역할에서도 확인이 되지만, "김장 " 연작에서는 더욱 적극적이고 활력이 있는 ‘오지항아리』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모진 추위 속에서 제 맛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김치처럼 이 땅의 여성들이 “씹혀도 당신 가슴 그 징한 곳에 오롯이 남아/한겨울을 너끈히/붙들고 일 어서”("김장 2")듯이 말이다. 한겨울을 너끈히 붙들고 일어서는 힘이 생기기 이전에 시련이 있었으니, 정신대들의 처참한 삶 을 소재로 한 "춘화도" 같은 작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염명순의 예쁜 언어는 나약하지 않다. 아니 나약함으로 오히려 나약함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약함이 염명순 시에 들어오면은 그리움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정신대로 끌려가 몸과 마음이 상처받았지만 그 여인들은 “환향의 미칠 듯한 그 리움”("춘화도 1")으로 들불처럼 일어선다. ‘환향』이라고 해서 염명순이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을 노래했다고 볼 수는 없다. "물푸레나무가 때죽나무에게" "체르노빌" 등 환경문제를 다룬 시들이나, "한국 근대 여성사" "김장" "춘 화도" 등 여성문제를 다룬 시들이나, "프랑스 대혁명 이백주년 축일에" "첫눈" 등 정치사회문제를 다룬 시들을 보면 염명순 의 그리움이 돌아가고자 하는 곳이 온갖 부조리로 오염된 조국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염된 고향을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렇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그리움의 시들에 힘을 부여하는 원기소가 됨은 분명하다.
염명순의 그리움이 섬기는 나라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시편들은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명징하게 나타난 것은 이 시집의 서 시라고 할 수 있는 "아침 노래"이다. 이 시는 시인의 그리움이 섬기는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대가 있어야 한다. 그대가 없이 혼자서 건설하는 나라는 그 나라가 그리움으로 세워져야 하는 나라이므로 의미 가 없다. 물론 그대가 없이도 그리움은 존재한다. 이 사실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데, 여기서 그대란 구체적인 실체로서가 아 니라 우리들을 그리움이 섬기는 나라로 이끌어가는 선각자를 상징하게 된다.
“길은 길 위에 넘어져 눈을 감고/어둠이 어둠 위에 넘어져/더 큰 어둠 만들어도/지금 어두운 새벽에/절망보다는 희망이 있어 슬프고/미움보다는 사랑이 있어 마음 아픈” 그리운 그대 이름을 불러보면, 그리운 그대는 우리들 그리움의 지도자가 되어 “어 두운 새벽길을/빛의 이름으로 걸어와/눈물로 씻겨 말개진 하늘을 보여주며/사람이 사람을 섬겨 아름다운 나라/눈부셔 눈물나는 아침의 나라가 왔다”고 소리 높여 외쳐줄 것이다.
염명순 시집 "꿈을 불어로 꾼 날은 슬프다"는 이와 같은 아침의 나라에 대한 끊임없는 그리움으로 치장한 예쁘고 수수하 면서도 힘있는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