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하 문학의 가장 무게 있는 결실, 금세기 한국문학의 분명한 수확
이제하의 첫 장편소설『열망』은 1986년부터 1년간 광화사(狂畵師)란 제목으로 한국일보에 연재된 작품으로 1987년에 문학 사상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그해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화제작이다.
이 소설은 거센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린 인사동의 화랑가를 배경으로 일탈과 광기로 가득 찬 화가들의 예술적 삶을 정면으로 해부한 충격적인 작품이다. 고용주에게 성폭행을 당하고도 강인하게 일어서는 한 여인의 초상을 통해 미술계의 복마전 같은 인맥 의 세부를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박진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작가 특유의 리얼리즘 기법과 독자의 예상을 뒤집어엎는 돌발 적인 사건 전개는 이제하다운 개성을 확인케 한다. 나아가 화가의 광기를 매개로 분단의 상처라는 시대적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천착한 점은 이제하 문학의 리얼리즘적 승리를 확연히 보여준다. 장편소설『열망』은 이제하 문학의 가장 무게 있는 결실 중의 하나이며 우리 소설계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분명한 수확이다.
예술가소설의 유형을 확실하게 구축한 이제하의 대표작
이제하의 소설은 대체로「유자 약전」「소녀 유자」와 같이 화가의 삶의 방식과 지향을 탐문한 예술가 소설과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처럼 샤머니즘을 주제로 한 소설의 두 유형으로 나뉜다. 예술과 생활의 문제는 이제하의 문학적 관심에 가장 중요한 모티프인데, 장편『열망』은 바로 그 예술가소설의 유형을 제일 확실하게 보여주는 이제하의 대표작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작품의 주무대가 되는 실솔화랑의 주인인 강지요라는 30대 중반의 이혼녀다. 소설은 이 화랑 여인의 시선 을 통해 우리나라 화단의 풍속도를 거침없이 폭로한다. 작가는 실솔화랑을 중심으로 생산자로서의 화가, 상품시장으로서의 화랑, 미술시장을 지배하는 자본과 자본주, 소비자로서의 대중, 그리고 매개자로서의 비평가 등이 복잡하게 얽히는 화단제도의 관계망 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예술의 세속화와 이에 따른 예술가의 소외를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소설로 씌어진 한 편의 예술사 회학이라고 할 만큼『열망』은 오늘날 자본제 사회에서 예술이 무엇이며, 또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리얼 하게 보여주고 있다.
장편『열망』에는 여러 유형의 화가가 등장한다.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며 시장의 논리를 거부하는 낭만주의자 서익, 예술을 상품화시킴으로써 시장의 논리를 따르고 대중과 영합하는 선우세오, 민중예술을 지향하는 김성식 등 다양한 성격의 화가들이 제각기 치열한 고민과 갈등 속에서 예술과 현실 사이를 오간다. 그 예술가들과 그들을 둘러싼 삶의 조건들을 통 하여 작가 이제하는 오늘의 삶의 조건 속에서 예술가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며 예술작품은 또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가 치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일탈과 광기의 미학-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
이제하는 데뷔 당시부터 미친 화가들을 등장시켜 집요하게 광기(狂氣)의 미학을 추구해오고 있는데,『열망』에는 그런 이제 하다운 개성이 유감없이 표출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형태의 일탈과 광기의 삶이 드러나 있다. 인물들의 한결같은 면모에 서 풍기는 기괴함, 비정상성과 광기, 기존의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일탈된 삶, 정상적인 가족관계의 파괴 등은 이 소설의 중심적 인 세목들이다. 주인공 강지요가 고용주 심형근으로부터 겁탈을 당하는 장면, 한강철교에서 투신을 시도하고 군중 속으로 스트리 킹을 일삼는 선우세오의 기행, 아내를 정신병원에 두고 여자라면 치마만 둘러도 겁탈하기에 도사급이 된 화가 서익의 광기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폭력과 기행, 일탈행동은 오늘날의 현실세계가 얼마나 훼손되어 있으며 그 훼손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삶이 어떻게 소외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제하는 의도적으로 소설에 미친 예술가를 등장시켜 그들 이 지닌 광기를 통해 그것을 야기시킨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하의 문학적 승리
또한 소설『열망』에는 이 광기의 모티프를 매개로 사회적·역사적 현실의 문제가 적절한 비중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분단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제하는 단편「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와 「용」에서도 분단으로 인한 상처라는 주제를 강렬하게 드 러낸 바 있는데, 여기서 그는 서익이라는 화가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그의 아내 허윤희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천착한다. 빨갱이 집안의 딸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허윤희는 미쳐야 했고, 서익은 그 미친 처를 더욱 미치게 만듦으로써 그 녀를 구하고자 그림을 그린다. 바로 그 서익의 풍경화가 암시하는 바 이 작품의 심층에는 분단이라는 민족사적·정신사적 과제가 그림의 세계 저쪽에 벽처럼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예술 그 자체의 세계와 분단이라는 시대적 과제, 이 두 벽을 맞세워 독특한 소설 공간을 만든 것, 이 점에 대해 김윤식 교수는『열망』이「유자약전」과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용」을 변증법 적으로 발전시킨 작품이라 규정하며, 작가 이제하의 문학적 승리라고 평가하고 있다.
70년대라는 괴물을 한 여인이 화랑가에서 겪는 사건들을 통해 조명하고, 또 그 여인의 분단의식에 이르는 과정을 파헤친 장편 소설『열망』은 작가로서의 이제하와 화가로서의 이제하의 상상력이 결합하여 빚어낸 수작(秀作)이다. 그의 문학적 상상력과 회 화적 상상력이 서로 겹치거나 분리되어 독특하고 미묘한 분위기를 창출한다. 개성적인 형식미와 리얼리즘적 수법으로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나아가 분단의 상처라는 역사적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듦으로써 무게 있는 주제의 식을 보이고 있는 장편소설『열망』은 이제하의 초기 대표작이며 그가 80년대 들어 이룩한 업적을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