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여성 작가 김민숙의 장편『시간이 마술을 걸어온다면』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702호와 704호의 두 젊은 여성의 삶을 통해 결혼을 앞둔, 혹은 결혼을 체험한 20, 30대 여성들이 의무와 책임으로만 짓누르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진정한 자아 찾기와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다. 관계맺음이 제공하는 일체의 구속을 거부하며 자유로운 남자 관계를 유지하는 이혼녀와 사랑 혹은 남자와의 관계를 단지 하나의 실험으로 규정하며 도전적인 삶을 살아가는 미혼녀, 이들이 보여주는 잿빛 유채화 같은 삶의 풍경을 구체적인 사건과 묘사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장편『시간이 마술을 걸어온다면』은 상처뿐인 여성이라는 존재의 쓸쓸함을, 권태롭고 무료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와 일탈에의 간절한 꿈을 예사롭지 않은 시각으로 보여준다.
여성만의 희생을 강요하는 남성 중심 사회에 반기를 든 두 여성의 이야기
장편소설『시간이 마술을 걸어온다면』은 두 명의 젊은 여성을 작중 화자로 등장시킨다. 작중 화자인 두 여성이 번갈아 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두 명의 젊은 여성은 같은 오피스텔에서 복도를 사이에 두고 각각 702호와 704호에 살고 있다. 702호 여자는 34살의 이혼녀로 시립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이고 704호의 여자는 전망 없음을 이유로 대기업 비서직을 그만두고 영어학원 강사를 하고 있는 27살 난 미혼녀이다.
그들은 동일한 상처를 안고 사는 닮은 여자들이다. 그들의 삶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상처받고 황폐되어 있다. 그들은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환멸을 느끼고, 여자이기 때문에 능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사회제도에 피해를 입은 경험을 갖고 있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지 5년이 된 702호 여자 조희원은 동료 바이얼리니스트, 연극 연출가 등과 연애를 한 혼외정사 전문이고 지금은 대학동창인 유부남 동영과 연애 중이다. 둘은 묵계처럼 항상 토요일에만 만나고 연애를 하되 자유로운 남녀관계를 유지한다. 그녀에게 결혼이란 이미 무의미하고 지루한 것일 뿐이며, 두 번 임신했을 때도 대단한 죄의식 없이 아이를 지울 만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거부한다.
704호 여자 민정섭에게 남자와의 관계는 단지 하나의 실험일 뿐이다. 스물 한 살에 대학의 연극 동아리 선배를 상대로 남성 경험의 첫 실험을 한 후 사랑 혹은 남자와의 관계를 실험정신의 유지 차원에서 치러내고 있다. 유부남 세준과의 사랑은 설레임에 의해서가 아니라 권태로운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탈의 몸짓일 뿐 사랑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떨림도 없다. 톱니바퀴 같은 생활 속에서 그저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껴안을 상대로서 남자가 필요할 뿐 그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다고 여긴다. 세준의 아이를 지우며 그와 결별한 후, 구속이 없는 동거를 하게 된 두 마리의 거북과 동거하는 남자 오승환과의 실패한 사랑 실험은 그녀로 하여금 진정한 홀로 서기의 깨달음을 남긴다.
같은 오피스텔의 같은 층에 사는 서른 넷의 여자와 스물 일곱의 여자, 이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려 하며 일상의 지루함과 존재를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의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분히 방탕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이들의 남성편력은 남성 중심의 가치와 권력에 의해 진행되는 사회구조에 대한 도전과 반항의 면모로 보아야 한다. 무료하고 모순적인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자 하는 이들의 꿈은 여성의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며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에 대한 반란이다.
완전히 절망해서 미이라가 된 여자의, 바삭바삭한 이야기!
작가 김민숙은 만 4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이 작품을 탈고하면서 완전히 절망해서 미이라가 된 여자의, 바삭바삭한 이야기를 쓰려 했다고「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이렇듯 장편소설『시간이 마술을 걸어온다면』은 원숙기에 접어든 작가가 남성에 의해,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에 의해 희생당하고 상처받는 여성의 절망과 아픔을 깊이있게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다. 사랑 그 간절하고 설레이는 이름을 위하여, 결혼 그 지독하고 지루한 감옥을 위하여, 여성 그 상처뿐인 존재의 쓸쓸함을 위하여 작가는 시간이 여성에게 걸어올 어떤 마술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