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적인 시세계를 보여주는 박주택의 두번째 시집 출간
86년 등단 이후 꾸준히 개성적인 시작 활동을 해온 중견시인 박주택의 두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그는 첫 시집 "꿈의 이동 건축"에서 상징주의적 수사학을 바탕으로 신화적 상상력을 폭죽처럼 터트리며 활기찬 시적 모험을 감행했었다. 이번 두번째 시집에서는 첫시집 상재 이후 짧지 않은 시간의 공백을 건너오면서 80년대를 관통한 젊은 영혼의 내면을 삶의 늙수그레한 풍경들 에 대한 담백한 묘사로 한 단계 승화시키는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삶의 일상공간으로 주의깊고 세세하게 스며들면서 생 의 스산한 뒷모습을 좇아가는 그의 시세계는 남루하고 추레한 존재들을 다감하게 끌어안는 겸허한 표정으로 가득하다.
부유하는 존재들의 닳고 닳은 환멸의 풍경을 정갈한 아름다움으로 포착
이번 시집에서 그가 열어보이는 주된 시적 공간은 어쩔 수 없이 세속도시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 삶의 갇힌 일상이다. 쭈글쭈 글한 늙은 집, 사연 많은 사람들을 제 초라한 뱃속에 들이는 여인숙, 저 혼자 걸어갈 수 없어 비맞고 있는 의자, 색바랜 벽지나 유행 지난 장신구, 싸락눈처럼 몸에서 빠져나간 무수한 동작들이 일상의 풍경을 이룬다. 이러한 풍경들은 그가 집중적으로 천착 하고 있는 늙음의 대상으로 확연히 드러난다. 늙음 혹은 늙은 존재에 대한 그의 시선은 삶의 소멸에 대한 관심과 맞닿아 있다. 삶의 소멸 혹은 시간의 헤아릴 수 없는 잔주름들, 죽음을 앞둔 허약하고 쓸쓸한 노인 등의 늙은 대상은 그의 시집 곳곳 에서 산견되고 있다.
시인은 이와같은 늙음-죽음을 향해가는 시간의 주름을 참으로 간명하고 절제된 소묘로 형상화한다. 수사학적 열정을 삭이고, 구질구질하고 스산한 풍경이나 보잘 것 없이 버려진 사물들에 대해 담백하고 정태적인 묘사로 선명한 미학을 일궈내고 있는 것이 다. 첫시집에서 보여주었던 상상력의 비상을 통한 추상성의 세계와는 괘를 달리하는 이러한 미학은 박주택이 삶의 화려한 외장 너머의 진지한 진실에 깊이 있게 접근하며 생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발전과 풍요와는 상관없는 소외되고 뒤쳐진 변두리 공간의 누추한 일상에 가닿는 시인의 시선은 잔인한 생의 끝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부유하는 존재들의 닳고 닳은 환멸의 풍경을 정갈한 아름다움으로 포착하고 있다.
불결한 현실의 리얼리티를 간명하고 절제된 언어로 묘사
박주택은 이번 시집에서 황폐한 현실을 내려와, 그에 대한 환멸과 자기 모멸의 풍경을 집요하게 그려낸다. 대부분의 그의 시 에는 공허와 폐허의 분위기를 풍기는 배경과, 비린내나고 초라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는 본래적 생명력과 삶의 동력을 상실한 채 쇠멸해가는 현재의 무기력을 대변하고 있다. 시인은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며, 꿈도 사랑도 삶의 의지도 세월에 닳아 해져버렸음을 고통스럽게 확인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텅 빈 몸 속의 구더기로 비유한다. 이 지점에서 시인의 상상력 은 몸의 생태학을 따라간다. 화자는 무엇이든 다 먹어치우는, 심지어 생명과 그 안에서 반짝이는 황홀했던 것까지 먹어치우는, 그래서 설사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진짜 식욕, 즉 건강한 생명력이 세월의 탁류에 오염되어 가짜 식욕, 즉 공허로 인한 무분별한 욕망으로 변질된 것을 의미한다.
결국 박주택은 나는 나 자신으로 살아오지 못했다라는 자책과 회한을 통해 자신의 타락과 무기력과 나태를 반성한다. 우리 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적나라한 현실 인식과 그것이 낳은 자기 반성이다. 박주택의 시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90년대적 삶의 외양 속에서 폐허와 적막의 징후를 발견하고, 그 누추하고 불결한 현실의 리얼리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최 대한 절제하고 대상의 한 순간을 정적으로 묘사하는 이 시적 기법에는, 현실을 직시하며 그것을 견디려는 시인의 저항의지와 치 열한 반성의 자세가 내장되어 있다.
휘황한 세상이 감추고 있는 늙음과 죽음의 뒷풍경
박주택의 두번째 시집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어떤 단단하고 무거운 존재들도 시간 앞에 녹아내리고 바스라져버릴 수밖에 없 다는 낯익은 진실일 것이다. 생에 대한 어떠한 규범적인 의지나 가슴 벅찬 열망은 그의 어느 구석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존재도 시간과 싸워 이길 수 없고 아무도 스스로의 육체 속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 시간을 털어낼 수 없다. 남는 것은 시간의 주름이 가져다준 쭈글쭈글한 환멸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단지 그 쓸쓸함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쓸쓸함을 마주하기 위해, 그 속에서 겨우 숨쉬고 있는 아름다움을 위해 노래한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소멸 자체가 아니라 소멸을 살고 있는 존재들에 대 한 지독한 사랑이다. 우리들의 일상적 삶이란 죽음에 대한 은폐 혹은 죽음에 대한 다시-죽임에 의해 건설된다. 삶이 시들어간다 는 것, 우주 전체가 시들어간다는 것을 일깨워줌으로써 그는 생의 한 부정할 수 없는 기초를 보게 만든다. 새로운 것, 깨끗한 것 , 편리한 것의 신화로 건설된 동시대의 문화공간에서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 삶에 대한 반성적인 의미를 포함한 다. 우리는 이제 시인처럼 저 휘황한 세상이 감추고 있는 늙음과 죽음의 뒷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