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들어 시에서 소설 쓰기로 전업, 연이어 화제작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고 있는 원재길의 네번째 장편소설『모닥불을 밟 아라』가 출간되었다.
장편『모닥불을 밟아라』는 환멸의 현실로부터 경쾌한 웃음과 풍자를 거쳐 환상과 모험의 세계로 가는 삶의 도정을 선연히 보 여주는 문제작이다. 작가 자신의 유년 체험을 투과해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 꿈과 실제를 거듭 오가며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모험을 한껏 펼쳐 보이는 이 작품은 개인의 내면에 간직된 정신적 외상과 더불어 개인의 삶을 좌절시키는 현실의 속악함을 새로 운 서술방식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원재길 소설의 개성적인 면모를 뚜렷이 보여준다. 특히 이 소설에서 과감하고 파격적인 소재를 동원한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신기한 마술의 세계가 갖는 의미를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성찰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문학의 진정성에 관한 순정어린 고뇌를 담아내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어 값진 성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원재길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사학과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기형도, 성 석제 등과 교우하며 습작시절을 보낸 그는 1986년 시 동인 세상 읽기를 결성하여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설 쓰기에 주력, 장편소설『겉옷과 속옷』『그 여자를 찾아가는 여행』『오해』와 소설집『누이의 방』등 화제작을 연이어 출간했다.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마술적 모험의 대서사
소설은 주인공이 기억을 잃은 어느 여름밤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이틀밤에 걸쳐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적이 있다. 그때 나 는 낯선 강가에서 붉은 장갑을 낀 중년 남자를 만난다. 그는 마술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술사는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온갖 종류의 기괴하고 황당한 모험을 만끽하게 해준다.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사건들과 겹쳐서 나의 성장기가 차례로 재생된다 . 딱따구리 목걸이를 건 마술사 아저씨와 함게 한 유년기, 전위예술가를 지망하는 큰집 형과 보낸 청소년기가 주마등처럼 스쳐간 다.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어린 시절 만났던 마술사 딱따구리가 마흔 살이 지난 나이에 베스트셀러 시인 겸 출판사 사장으 로 둔갑한 것을 목격한다. 나는 시인 지망생이었던 아내의 추적에 힘입어 딱따구리 아저씨가 남의 시를 표절한 사실을 알아낸다. 언론에 폭로하였다는 이유로 딱따구리 아저씨는 나를 납치한다. 그는 모닥불 앞에서 새벽달이 울기 전까지 완벽한 마술을 계속 펼치지 않으면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나는 온갖 마술을 부리다가 한 번도 연습해본 적이 없는 맨발로 모닥불 위를 걷는 마 술을 부려 보인다. 그 사이 새벽닭이 울지만, 마술사가 처음의 약속을 어기고 나를 헤치려 다가오는 순간 뒤에서 돌진하는 기차 때문에 나는 밖으로 튕겨져 철길 옆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다. 동시에 기억을 되찾게 되는데, 꿈속에 나타난 붉은 장갑 흥행사 가 현실의 딱따구리 아저씨였음을 알고 씁쓸한 회오에 젖는다.
자유로운 백일몽 같은 경쾌한 상상력
이렇듯 장편『모닥불을 밟아라』는 마술로 상징되는 환상과 모험의 대서사를 원재길 고유의 서정적 체험 속에 흥미롭게 담 아낸다. 기억을 잃은 후 꿈의 형식으로 펼쳐지는 유년의 체험과 마술의 세계, 그리고 성인이 된 후의 현실의 속물적 세계가 교차 되는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일탈적인 환상적 소재를 현실의 문제의식으로 접목시켜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원재길 특유의 소설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꿈과 현실의 현란한 넘나듦을 통해 결국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마술로 표현되는 환상의 힘에 대한 통찰이다. 유년의 기억에서의 마술과 꿈속에서의 마술은 더없이 재미있고 환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행복한 도구이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마 술은 표절과 눈속임과 사기일 뿐이다. 어린 시절 신비롭게만 보였던 딱따구리 마술사는 성인이 된 후 표절한 시집으로 세상을 속인 사기꾼에 불과한 것이다. 신비로운 마술의 세계를 보여준 붉은 장갑의 흥행사가 현실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멸의 현실을 발견하는 과정, 바로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적인 줄기다. 그러므로 소설에서 펼쳐지는 비현실적이고 유 쾌하며 다양한 환상과 모험의 도정은 마술이 실현되지 않는 딱딱하고 근엄한 현실에 대한 매서운 풍자요 패러디에 다름 아니다. 웃음과 풍자, 유머러스한 인물상과 경쾌한 서사적 모험 등 이 소설의 재기발랄한 소재와 장치는 환멸의 현실에 대한 희화화의 전 략을 실현시키는 힘을 배가시키고 있다. 자유로운 백일몽 같은 경쾌한 상상력, 우리는 그것을 장편『모닥불을 밟아라』에서 마음 껏 즐길 수 있다.
문학의 진정성에 대한 순정어린 고뇌를 담아낸 문제작
한편 이 소설은 마술이 상징하는 환상의 힘을 문학의 가치의 영역으로 연결시켜 제시함으로써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각종 시집의 주요 구절을 표절해 베스트셀러 시집을 양산,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딱따구리 아저씨의 문학 사기극은 문학 이 더이상 성스럽거나 순정하지 않다는 씁쓸한 현실 인식의 단면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문학 역시 사기의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추악한 현실에 대한 환멸, 이 절망적 체험이야말로 원재길의 도저한 문학주의자로서의 고뇌를 표상한다. 문학이란 현실에 존재하 지 않는 것을 꾸며낸다는 점에서 마술과 동일한 거짓말의 세계라고 주장하며 독자의 마음을 유린하고 문학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딱따구리 아저씨에게 주인공은 강력하게 저항한다. 현실의 위악과 진실을 폭로하는 힘을 지닌다는 점에서 문학과 마술은 결코 같 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문학에 대한 순정한 믿음과 추악한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한 작가 자신의 고뇌를 진솔하게 보여준다.
환상과 모험, 웃음과 풍자의 세계에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환멸의 삶에 대한 주의깊은 통찰, 그리고 문학의 진정성 에 대한 순정어린 고뇌까지 폭넓게 담아내고 있는 장편소설『모닥불을 밟아라』는 원재길 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로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