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후 곧이어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을 수상함으로써 주목받는 신인작가로 급부상한 조경란의 첫 소설집.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인 장편 『식빵 굽는 시간』은 서른 살 여성의 황량한 내면을 탁월한 문체미학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일약 그녀에게 새로운 시대의 문학을 이끌어갈 무서운 신예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조경란의 첫 창작집 『불란서 안경원』에 수록된 10편의 중단편은 등단작 「불란서 안경원」에서 최근작「내 사랑 클레멘타인」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숙한 단편미학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탄탄한 구성과 섬세한 문체를 바탕으로 미묘한 인간관계의 내면과 삶의 심층을 진집하게 파고드는 그녀의 소설은 때로 음험하고 불길하면서도 음울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커다란 공명을 일으키며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누추하고 단조로운 일상과 가족이라는 제도적 굴레, 속악한 세상의 폭력성과 운명의 세속성, 이 모든 것을 고발하고 파괴하며 끌어안는 그녀의 소설은 사람들 간의 기이한 관계의 틈을 헤집으며 내면 깊숙이 감춰둔 상처와 욕망을 거침없이 들춰내고 삶의 어둡고 피폐한 영역을 들춰낸다. 그러면서도 존재의 부재와 결핍을 따뜻이 감싸고 상처 입은 영혼의 실존적 고투를 진지하게 그려낸다. 번뜩이는 은유와 상징, 섬세한 내면묘사가 돋보이는 그녀의 첫 소설집은 이 어두운 세기말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심층에 도사린 불합리성에 대한 진지하고 매혹적인 탐문을 보여주고 있다.
불우한 가족사와 세상의 폭력성에 첨예하게 맞서기
표제작이자 등단작인 「불란서 안경원」은 안경점의 "12자, 8자 통유리"의 안과 밖이라는 이중구조를 통해 바깥 세상의 일상을 다양한 인물들과 함께 생동감 있게 묘사한 탁월한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은 단편이다. 그녀에게 안경점 밖의 세상은 남성적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유리 바깥에서 자신을 향해 자위행위를 하는 남자의 행위는 충격적이다. 그와 같은 세상의 폭력성에 그녀는 "내가 우습게 보이는가 당신들"이라고 절규한다. 속된 세상의 폭력성에 맞서기로는 「천국처럼 낯선」도 마찬가지다. 생활설계사인 나가 부딪치는 세상은 너무 거칠고 험하다. 계약 권유를 위해 찾아간 빌딩에서 나를 성폭행한 남자, 어느 날 낯선 남자와 함께 불현듯 찾아와서는 자기 집인 듯 눌러앉아버린 먼 친척뻘이 되는 옥주언니, 그들은 나의 삶을 무차별하게 침입하는 폭력자들이다. 이 소설은 속악한 세상의 폭력성과 해독할 수 없는 삶의 어두운 영역을 차분한 호흡으로 밀도 있게 탐문하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조경란의 소설에서 세상의 견딜 수 없는 폭력은 우선 가족으로부터 찾아온다. 「당신의 옆구리」나 「환절기」는 불우한 가족사가 소설의 전면에 음침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특히 중편 「내 사랑 클레멘타인」은 불우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개인의 실존적 고통을 첨예하게 다룬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오 년째 죽어가는 뇌세포로 기억을 상실해가고 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그녀에게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외면하는 낯선 타인들 같다. 음식을 앞에 놓고도 먹는 방법을 몰라 허둥거리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되는 그녀의 하루는 참혹하다. 아침저녁으로 병든 아버지와 시름에 겨운 어머니를 지켜봐야만 하는 고통, 그 적나라한 쓰라림으로부터 그녀는 벗어날 수 없다. 그녀의 가족을 감당할 수 없어 애인은 떠나버렸고 집안에 가득 찬 한약 달이는 냄새는 죽음의 냄새인 듯 그녀의 숨통을 조인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로 인한 가족들의 정신적 궁핍과 실존적 고투를 섬세하게 그린 이 소설은 섬뜩할 정도로 담담하게 그녀의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묘사하고, 가족이라는 전통적 주제에 대한 깊은 소설적 탐구를 보여준다.
세기말적인 모티브를 악마적 꿈을 통해 절묘하게 형상화
조경란의 소설에서 삶으로부터 가해지는 내면의 상처를 다루는 방식은 다양한 양태를 보인다. 이는 그녀의 소설을 다각도의 시각으로 읽게 하는 이유가 된다.
「푸른 나부(裸婦)」는 한 소녀와의 범상치 않은 만남을 통해 상처의 긍정과 존재의 갱생을 차분하게 그린 작품이다. 스물아홉의 나는 초여름 어느 날 목욕탕에서 신상명세가 모두 들어 있는 가방을 잃어버린다. 사흘 뒤 소포 하나가 도착한다. 집 열쇠를 제외하곤 잃어버린 것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후 가방을 훔친 소녀는 어느 새벽 나에게 들이닥친다. 함께 누운 잠자리에서 나는 "흡사 썩은 영혼을 토해내듯" 그녀에게 유난히 크고 뾰족한 귀에 얽힌 오래된 내면의 상처를 털어놓는다. "진화가 안된" 나의 귀는 감추고 싶은 흉터이자 치부였던 것. 그녀가 떠난 후 나는 머리를 짧게 커트함으로써 세상을 향해 귀를 내놓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꿈 같은 하룻밤 동안의 만남으로 그 소녀는 일상을 흔들어놓으며 나에게 새로운 삶을 남겨두었던 것이다.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 풍부한 은유와 상징을 숨겨놓고 있는 이 소설은 타인과의 예기치 않은 교류와 소통에서 삶의 진화의 한 대목을 발견하고 있다.
치욕 같은 삶을 사는 한 무기력한 남자의 억압된 꿈을 섬뜩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인 「꿈」에서 그는 빨래를 하고 밥을 지으며, 외출하는 아내를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일상에 갇혀 있다. 아내보다 무능해서 집안 살림을 맡고 있는 그에게는 희귀한 불치병 같은 만성적인 두통을 함께 앓고 있다는 이유로 정부(情婦)가 된 그녀가 있다. 두통과 일상과 아내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것처럼 그녀로부터 도망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그는 사로잡혀 있다. 급기야 그는 정사 후에 잠든 그녀에게 살의를 느낀다. 그는 가스레인지에 연결된 호스를 잘라 그녀를 살해하는 꿈을 꾼다. 그녀의 방을 도망쳐나와 거리를 헤매던 그는 가스폭발사고의 소식을 접한다. 두려움에 빠진 그는 전속력으로 사력을 다해 집으로 달린다. 일상의 족쇄에 구속당한 채 삶에 대한 적의를 품고 사는 사내의 불구의 삶과 일그러진 욕망은 우리 시대의 병든 내면에 다름아니다. 이 작품은 "일상적인 공간에 스며들어 있는 세기말적인 모티브를 한 남자의 억압된 악마적 꿈을 통해 절묘하게 형상화한 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한편 「사소한 날들의 기록」은 내면의 상처는 타인과의 관계나 대화에 의해서 풀리지 않는 고유의 견고한 벽을 갖고 있음을 확연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는 자기고백과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음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받고자 하는 심리 치료 프로그램에 참석한다. 그러나 나는 이 상담에서 타인들이 고백을 통해 내면의 정화를 꾀하는 현장을 목도하면서도 자신의 상처를 끝내 드러내지 못한다. 복합적인 시선을 교차시키면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욕망과 결핍의 삶을 나와 타인의 이중적인 앵글로 포착함으로써 독특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소설문법의 징후와 닿아 있는 소설
그 외에 한 여자가 남긴 유서와 생의 기록이 담긴 소포를 통해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 타자의 죽음이 자신의 생에 미친 파장을 섬세하게 다룬 「중독」, 세상과 유폐된 지옥 같은 집에서 사는 아버지와 딸의 기괴한 관계를 다뤄 음산한 단편미학의 성취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은 「목이 긴 사내 이야기」등 조경란의 첫 창작집 『불란서 안경원』은 전형적인 서사구조와 서정적인 분위기, 섬세한 문체미학이 조화를 이루며 요즘 신세대적인 경박함과는 다른 안정된 소설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인물들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펼쳐 보이는 기이한 행위들과 끔찍한 삶을 견디는 존재의 처절한 고통을 다양한 은유와 상징을 통해 묘사하는 그녀의 소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소설문법의 징후와 닿아 있다"는 찬사를 받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