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마술로 펼쳐지는 집요한 언어탐구자의 고뇌와 절망
시「저문 강에 삽을 씻고」와 「8·15를 위한 북소리」로 한 시대를 상징하는 행복한 시인으로 우리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정희성 시인의 처녀시집『답청』은 그 시들이 왜 7,80년대를 가로지르는 시맥(詩脈)의 한 봉우리인지 말해주는 중요한 시집이다.
정희성 시인을 흔히 지조 있는 선비, 지사에 비유하곤 하는데, 그만큼 그의 시는 철저한 자기성찰과 수양의 정신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현실과 마주한 지식인적 고뇌가 그의 시의 한 줄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그의 시가 현실참여라는 무게에 눌려 관념적이거나 상투성에 매몰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가 투철한 현실 인식 못지 않게 삶 속에서 부단히 갈등하는 자아의 현실적 내면을 진솔하게 투시하고 삶의 구체성 속에서 획득되는 일상적 깨달음을 소중하게 보듬어 안기 때문이다. 그래서『답청』에는 명상시라고 할 수 있는 시편들은 여럿 있다. 자기의 내면과 주변세계에서 일어나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맑고 열린 마음으로 품는 일련의 시들은 단순히 자연시나 관찰시에 머무르지 않는 통찰과 인식의 깊이를 보여준다.
정희성 시인은 슬픔 속에서 힘을 만들어내는 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애수의 시인도, 격정의 시인도 아니다. 그의 슬픔은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온 체관과 지족(知足)의 경지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준다. 자기 담금질의 냉철한 지적 이성과 실천으로 허무와 분노의 피를 다스려 절제된 상상력의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시 본연의 오랜 전통과 호흡을 같이한다. 하찮은 일상의 진부함 속에서 삶의 진실을 길어내는 시인의 순정한 마음이 시집『답청』에는 깃들어 있는 것이다.
정희성 시인은 1945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제1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답청』『저문 강에 삽을 씻고』『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가 있다. 현재 숭문고둥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