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망명자의 자유로운 글쓰기, 고종석의 첫 소설집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서 우리 문화계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해온 고종석의 첫 창작집『제망매(祭亡妹)』가 출간되었다.
고종석은 한겨레신문 기자로 일하던 지난 93년 장편소설『기자들』을 출간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 여러 종류의 글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1995년 동인문학상 후보작이 된「제망매」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아오다가 이번에 여러 단편소설들을 묶어 첫 소설집을 펴냈다.
소설집『제망매』는 지식인의 도저한 부정정신과 섬세한 감수성이 만나 이루어진 아름다운 언어의 구조물이다. 서구 지성사에 관한 폭넓은 관심과 꾸밈없이 전개되는 명쾌한 문장은 세계인으로서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작가의 활달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한 자발적 망명자의 자유로운 글쓰기가 집적해낸 이 소설집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한편 현대인에게 열린 사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이며 우리 문학이 미답(未踏)으로 남겨둔 길을 탐사하는 모험을 보여주고 있다.
생에 대한 누대에 걸친 환상을 심문하고, 조롱하고, 격파한다!
소설집『제망매』에 수록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지금껏 몸담고 삶을 일궈오던 조국를 떠나 스스로 파리에서의 영원한 주변인으로의 삶을 선택한 고종석의 자유로운 사고와 비판적 인식을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가 지향하고 추구해오던 진정한 자아, 자유로운 세계인으로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삶의 모습을 면밀히 탐구하면서 집요하게 현대인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즉 비이성적이고 전근대적인 인간상에서 탈피한 이성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자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담고 있는 것이다.
결코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가족과 조국이라는 틀에 길들여진 현대인이 세습화되고 관습화된 관계에 묶여 삶의 진실을 바로 찾지 못하고 있음을 그는 투철하게 회의하고 파헤치려 한다. 주어진 관계들 안에서 바둥대다가 결국은 소소한 이기심으로 고립된 실존의 황폐함만을 껴안을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고독한 모든 이들의 심장에 그는 날카로운 화살을 쏘아댄다. 문학평론가 황종연이 지적했듯이 "세습된 사회적 관계에서 탈출하는 것,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들의 제휴를 추구하는 그의 소설은 인생에 대한 누대에 걸친 환상을 심문하고, 조롱하고, 격파한다."
영원한 주변인이 추구하는 세계인으로서의 자유로운 삶
소설집『제망매』에는 1995년 동인문학상 후보작이었지만 처녀작이라는 이유로 아쉽게 당선에서 제외되었던 표제작「제망매」를 포함하여 총 5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유기」에서는 인간이 삶에서 궁극적으로 떨쳐내야 하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탐문하고, 「찬 기 파랑」을 통해서는 작가 고종석이 추구하는 성숙된 세계인의 의식 양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그로 하여금 익숙한 곳을 떠나 파리의 변두리에서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한 동력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제망매」
애초에 무슨 뿌리가 있어, 내가 있었단 말인가.
한 뿌리에서 난 사촌 동생이지만 작중화자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촌 누이동생의 죽음을 통해 인간 본연의 의미를 깨고 있는 작품. 서울에서 기자생활을 하다가 파리로 날아간 작중화자 이진우는 이기적인 가족들과 조국에서는 발견하지 못하던 유대의 끈을 혜원이라는 이종사촌 누이동생에게서 강하게 느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세상과 삶에 대한 낙관을 지닌 그녀의 사랑과 관계맺음에서 근거한다. 그러나 이진우가 지루한 일상을 피해 빠져나온 서울에서 그녀는 홀로 의연히 죽어간다. 이 작품은 혜원이라는 여성을 통해 규정되고 주어진 관계 안에서가 아닌 열린 세상에서 진정한 세계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서유기」이 작품에는 작가 자신을 투영시킨 것으로 보이는 작중 화자와,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돼 십수 년 간 망명생활을 하다가 그간의 경험을 기록한 산문집을 펴내 한국의 베스트셀러가 된 문필가, 아랍 출신의 여성 사진 작가 등이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고국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정신적이든 실제적이든 망명을 선택, 파리의 주변인으로 살며 정체성을 질문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그들과의 사연을 계기로 표출된 작중 화자의 상념들이다. 각자 다른 사연들로 인해 망명 생활을 하는 인물들을 통해 작중화자는 역사나 집단에 예속된 삶의 부질없음을 폭로하고 진정한 인간의 정체성을 지닌 세계인을 추구하고자 하면서 스스로를 자발적 망명이라 칭한다.
「사십세」
머지 않아 사십세를 맞는 작중화자가 이남희의 소설집 『사십세』를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큰아이의 생일,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자신의 삶을 관통해온 아버지와의 불화를 떠올리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아버지의 존재가 스스로의 모습에서 발견됨을 보고 절망하면서도 아버지와 다른 모습을 애써 찾아내며 스스로를 위안하려 한다. 하지만 그가 보고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사십세 이후의 아버지였던 것. 이제 사십세를 맞는 작중화자의 모습을 의문으로 두고 고향을 찾는 결말을 통해 작가는 애써 부인하려 하는 유전의 모습 위에 성숙된 삶의 모습을 얹어두려 한다.
「찬 기 파랑」
이 작품에서는 20세기 세계 역사의 현장을 찾아 다니며 세계의 주요언어를 연구했던 프랑스 언어학자 기 파랑의 생애를 더듬고 있다. 기 파랑의 세계인으로서의 자유로운 삶과 연구활동을 추적해가면서 작가자신이 지향하고자 하는 열린 사회로의 사고가 드러나 있다.
「전녀총 이여성 회장님께 드리는 공개 서한」
편지의 형식을 통해 구성된 이 작품에서는 여성 채용에 있어서의 용모 기준이라는 문제를 계기로 촉발된 사회 내의 불평등에 대한 편견된 인식을 고발한다. 패션회사 인사과장으로 있는 작중화자가 여성사원 채용시에 용모를 전형기준의 하나로 삼았다는 이유로 여성단체의 강력한 항의와 함께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자 공개 서한의 형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한다. 그것을 통해 작가는 조직과 단체 내에서 왜곡되는 개인과 진실과 정의의 모습으로 둔갑하는 편견을 보여준다.
파리에서 보내온 세계와 자아, 그리고 완성된 삶에 대한 화두
고종석의 소설은 소설같지 않다. 작품 곳곳에서 부유하는 자아는 마치 일기장에서 툭 불거져 나온 작가 자신인 양 우리의 삶에 날카롭고 집요한 물음을 던져대고 있다. 전통적인 소설양식을 고수하기보다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고정된 틀 안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현대인에게 사고의 열린 지평을 보여주고 있다. 작중 화자를 통해 자발적 망명이라 말하고 있는 작가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새겨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조국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다. 타국이 다 고국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계가 다 타국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