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별’이 뜨는 하늘과 ‘초록 토끼’가 사는 땅을 지나 도달한 한 세계의 정점,
송찬호 시인의 세 번째 동시집 『여우와 포도』
송찬호 시인의 세 번째 동시집이 출간되었다. 시인이 아이와 자연 사이에서 발견한 새로운 언어들이 명징하게 빛났던 첫 동시집 『저녁별』, 동시에 스민 동화적인 상상력의 재미를 드러냈던 『초록 토끼를 만났다』에 이은 『여우와 포도』는 수많은 모습을 한 생명체들의 목소리로 와글와글한 숲의 세계다. 바위가 초원을 달리고 곰이 빵을 굽고 포도가 단단한 이빨로 여우를 깨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 펼쳐져 있을지 짐작할 수 없는 무궁하고 빽빽한 숲은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숨기고 있다. 책장을 열고 들어오는 독자라면 누구든 품어 안을 준비를 마쳤다.
나이 많은 늑대의 기억과 망각, 그리고 이야기들
구두 가게 진열장에
새 구두가
진열되어 있어요
구두 가게 사장님,
저기 푸른 구두 두 켤레는
어느 신사가 신어야 어울리는 건가요?
하하, 저기 있는 구두 네 짝은
두 켤레가 아니라
한 켤레랍니다
어느 멋진 늑대가 예약한 구두이니까요
-「늑대 구두」 전문
날렵한 라인과 세련된 색상의 구두를 주문해 둔 손님은 누구일까. 「늑대 구두」 외에도 「겁 많은 늑대」, 「나이 많은 늑대」 등 늑대를 소재로 한 몇 편의 시들에서 우리는 각 시의 늑대들이 통과한 시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양이나 사슴을 만날까 두려워 이빨과 발톱을 기르는 시간, 돋보기 안경을 쓰고 흔들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으며 지난날 아기 돼지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시간들이 올올이 기록되어 한 늑대의 털빛이 결정된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그 안에 깃든 지난 이야기들이 살아나 흔들리듯 일렁일 것이다.
“이야기꾼들은 대개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순한 기억의 전수자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시간으로부터 왜곡되고 뒤틀리는 기억을 안간힘을 다해 막아내는 동시에,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진행되는 망각의 틈을 자신과 당대 삶의 이야기로 메운다. 훌륭한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삶의 늘 새로운 원전(元典)일지도 모른다.”
『동시마중』 53호 「늙은 늑대와의 20분 송찬호+김륭」 대담에 실린 시인의 말이다. 그가 온 삶을 통해 끌고 온 이야기들이 우리의 오늘에다 어떤 단서를 던지게 될지, 커다란 기대와 궁금증을 품게 되는 대목이다.
언덕 넘어 산 넘어 울창한 나라 푸른 참나무숲
공원엘 갔는데
까마귀가 벤치에 앉아
큰 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호두나무에 빨간 꽃이 피었습니다”
호두나무에 빨간 꽃이 핀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킥킥거리고 웃자
조금 당황한 까마귀는
자세를 가다듬고
더 큰 소리로 책을 읽었다
“호두나무에 빨간 꽃도 피고 노란 꽃도 피었습니다…”
-「까마귀의 책 읽기」 전문
『여우와 포도』를 채우고 있는 장면들은 상투성과는 가장 먼, 오히려 낯설고 모호해 한 번에 잡히지 않는 이미지와 감각으로 가득하다. 이백 살 상수리나무의 기억 속에서 곰이 사냥꾼보다 먼저 총알을 날리고(「곰이 먼저 쏘았다」), 고양이 옆에서 부풀던 밀가루 반죽이 야옹 소리를 내며(「밀가루 반죽과 고양이」) 서로의 자리가 뒤바뀐다. 숲을 지키기 위해 바나나칼을 휘두르는 다섯 마리 너구리들(「너구리 결사대」)의 우스운 결기, 소년의 발자국마다 오쏙 오쏙 솟아나는 호기심쟁이 버섯(「숲속 길」)의 생생한 이미지, 당나귀 프로야구 계절 안 오나 투덜거리며 푸헝 푸헝 콧김을 내뱉는 당나귀(「당나귀 TV 시청법」)의 어이없는 여유로움 등이 여느 동시에 없었던 새로운 감각과 상상을 일깨운다.
그들이 같이 잠들고 꿈꾸고 깨어나 학교에 가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사슴들이 아무도 왕 하고 싶지 않다며 두고 간 왕관은(「목련꽃」) 누가 가져갔을까. 철가방을 맨 짜장면 배달맨이 높다란 산 앞에서 큰 소리로 찾고 있는 할미꽃은(「할미꽃과 짜장면」) 어디 숨어 있을까. 도토리 왕자가 꿈꾸던 “울창한 나라/ 푸른 참나무숲”(「도토리 왕자의 꿈」). 시인이 아이들에게 펼쳐 주고 싶었던 세계의 모습이다.
공기를 먹고 날아오르는 기분으로
동화 『탄탄동 사거리 만복전파사』라든가 지식그림책 『달리는 기계, 개화차, 자전거』 등 다양한 분야의 어린이책을 통해 다채로운 스타일을 보여 주고 있는 화가 조승연의 그림은 이번 동시집을 꼭 알맞은 캐릭터들로 채워 주었다. 여러 가지 결의 텍스처를 섞어 차분한 톤으로 완성한 그림들은 이 세계의 중력을 반으로 줄인 듯 우리의 발을 자유롭게 한다. 표정에 깃든 웃음과 그가 묘사한 공기의 질감이 시를 읽는 기분을 한결 행복하게 한다. 내려다보면 온통 초록인 숲속으로, 자박자박 걸어서 들어가 보자.
추천사
‘에디슨 돼지’와 ‘초록 토끼’라는, 우리 동시사에서 가장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 송찬호 시인이 또 한 번 “이상하고 신기한 세상”을 여기 펼쳐 보인다. 포도는 여우를 깨물고, 당나귀는 똥 한 무더기 싸 놓고 TV를 보고, 거미는 은행 창구에서 돈을 세고, 곰은 도서관 책을 잔뜩 빌려 가고, 까마귀는 공원에서 낭독을 한다. 시인은 좁디좁은 인간만의 시각을 훌훌 던져 버렸다. 그렇게 그려낸 세상은 만물이 모두 하나로 어우러지는 신화적이고 동화적이고 우화적인 세계다. 그 시적 완성도와 재미를 즐기다 보니 시인이 어떤 정점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_남호섭(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