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동이에서 태어나 물이
세상천지를 떠돌아야 하는 아기
아기는 물동이에서 태어나 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삼신은 나지막한 산자락 끄트머리, 날마다 산고랑 샘물을 떠놓고 빌었던 아주머니와 아저씨 집 물동이 속으로 아기를 보냈다. 이토록 정성이 깊은 부부라면, 아기 옷을 짓는 선녀의 실수로 솔기가 조금 터진 옷을 갖게 된 물이를 삼칠일 동안 세상 독에 닿지 않도록 지켜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계집애라 실망하는 아주머니의 말 독에 닿게 된다. 그 순간 아기의 영혼 한 조각이 터진 옷 솔기로 빠져나와 구렁이가 되었다.
물이와 함께 태어난 동무 구렁이는 물이와 함께 놀고 함께 자란다. 구렁이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물이지만 동무 구렁이는 세상 사람들 그 누구의 환대도 받지 못한다. 물이는 결국 아주머니가 들려 준 밥바구리 속에 구렁이를 숨기고, 제 밥은 제가 벌어먹기 위해 길을 떠난다.
제 발로 걸어서 제 손으로 엮어서
마침내 온전한 자신을 완성하기까지
글 배우는 집에서 차가운 세상의 이치를 어렴풋이 깨닫고, 거기서 만난 재주 많은 아이와 함께 깊은 산속 외딴집, 아무도 없는 마을을 지나며 물이는 삼신이 던져 버린 은바늘을 찾아 동무 구렁이의 옷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어느 곳에도 깃들여 살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 요령이 없고 서툴러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물이는 매순간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내어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간다.
자분자분 귀에 감기는 옛이야기의 문체와 외롭고 고되지만 가야 할 곳으로 굳건히 나아가는 물이의 태도는 읽는 이를 이야기 속으로 힘 있게 끌어당긴다. 마침내 마지막 바늘땀을 매듭짓고, 동무 구렁이와 이별하는 아름다운 절정에 이르면 태어난 생명이라면 마땅히 걷게 되는 삶이라는 이름의 길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다. 셀 수 없는 순간들이 그 위로 흐드러진다.
작가 임정자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이야기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이야기꾼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옛이야기 형식을 빌려 객관 세계에 투사한 작품이다. 동시에 우리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내적 성장기로도 읽힌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내면에서 본질적으로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_김진경(시인, 동화작가)
구렁이는 물이를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게 하는 존재이자 물이의 상처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물이가 온전한 자신을 찾아 걸을 수 있게 하는 분명한 힘이다. 원초적인 상처와 대면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한 사람이 본질, 다시 말해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물이, 길 떠나는 아이』는 작가 임정자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삶이 태어난 물동이이기도 하다. 임정자는 『무지무지 힘이 세고, 대단히 똑똑하고, 아주아주 용감한 당글공주』 『흰산 도로랑』 『동동 김동』 『오국봉은 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나』 등의 귀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크게 숨 쉴 수 있는 세계, 마음껏 성장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그 성취를 인정받아 2017년 제8회 권정생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20년의 눈과 손으로 다시 펴내는 이야기
『물이, 길 떠나는 아이』는 2005년 처음 출간되었다. 이번에 출간되는 책은 15년의 시간을 건너 새로이 출간되는 개정판이다. 유년의 어떤 순간이 품은 복합적인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풀어낸 작품 『열세 살의 여름』을 통해 선명한 인상을 남겼던 이윤희 화가가 그림을 맡았다. 빛나는 눈과 앙다문 입매의 단단한 캐릭터로 거듭난 물이는 모든 세대의 여자아이가 지나온, 지나고 있는 시간들을 이야기한다. 다시 한번 문장을 가다듬고 말끔한 만듦새로 단장한 『물이, 길 떠나는 아이』, 지금의 아이들에게 유효한 의미로 다가갈 준비를 마치고 첫 발을 내딛는다.
“사람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먼 길을 걷는 것과 비슷한 거 같아요. 어떤 날은 평탄한 길을 걷듯 하루하루가 편한가 하면, 어떤 날은 높은 산을 오르는 듯 순간순간이 힘겨운 날이 있고, 흡사 사나운 맹수를 만난 것처럼 두려운 상대와 맞서야 하는 날도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을 길로 표현하나 봐요. 이 책의 주인공 물이가 동무 구렁이와 가는 길도 인생길이에요. 아기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걸은 길. 개정판을 내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제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았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여전히 어리숙하고 부족한 것투성이더군요. 그런데도 그럭저럭 살아가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은 함께 걷는 사람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서인 것 같아요. 참말로 고맙네요.” _임정자,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