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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나온 책 Book

수전 손택 영혼과 매혹

저자
다니엘 슈라이버
역자
한재호
출판사
글항아리
발행일
2020-09-23
사양
500쪽 | 128*188 | 양장
ISBN
978-89-6735-824-2 03840
분야
교양
정가
25,000원
신간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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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수전 손택이 거기에 존재했다
그는 알려진 게 아니라 선포됐다”

20세기 문화의 중심, 지성의 정점에서
‘수전 손택 프로젝트’를 말하다

책 소개


수전 손택이 세상을 떠난 2004년 12월 28일, 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 보도와 함께 그의 부고가 서구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기사들은 최상급 표현으로 가득했다. “아방가르드에 대한 열광적 지지, 그에 못지않게 열광적인 정치 선언으로 20세기 문단에서 가장 찬양받는—그러나 동시에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소설가, 에세이스트, 비평가 수전 손택이 거주하던 뉴욕 맨해튼에서 어제 아침 숨졌다.”(『뉴욕 타임스』) 국내 언론도 일제히 손택의 타계 소식을 전했다. 초기 대표작 『해석에 반대한다』를 시작으로, 손택의 저작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지 고작 2년 만이었다.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한겨례』) “뉴욕 지성계의 여왕이라 불렸던 작가이자 평론가.”(『한국일보』) “행동하는 미 지성.”(『동아일보』)
그러나 어떤 기사도, 가장 훌륭한 프로파일도 수전 손택이라는 인물, 그리고 인간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바로 여기에 손택을 상징하는 지성의 아우라, 무한한 관심사의 파노라마, 관습에 반하는 저항적 범주, 삶의 열정과 학식에 대한 열망, 내면의 양면성과 복잡성이 있다. 스스로를 열광적인 탐미주의자이자 완고한 도덕주의자라고 말한 손택은, 엄격한 지성주의에 입각해 전후戰後 비평계가 공유하던 틀을 깨부수고 기존에 확립되었다고 믿었던 분류를 전복하며 일평생 날카로운 질문과 결정적인 금언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해석이란 지식인이 예술작품에 가하는 복수다.”(1966)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2001) 초창기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금언은 예술에서 정치에 이르는 광범한 분야에서 변함없는 무게로 지금껏 널리 인용된다.
고급과 저급, 젊음과 늙음, 여성과 남성, 예술과 예술 아닌 것 따위의 경계를 무화한 특유의 재범주화 작업은 도어스와 「토이 스토리」를 향유하면서도 바르트와 정신의 삶을 논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관능적일 수 있는지를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손택은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나고 흥분되는 일인지를 강렬히 증언함으로써 뉴욕 지성계의 매혹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또한 일평생 체제 비판과 반전·인권운동, 파토그래피pathography(특정 질병이나 심리적 장애가 개인의 삶 혹은 공동체의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그러한 사유의 가치를 현실세계에서 급진적이고 대담하게 밀어붙였다.
손택의 삶은 20세기의 수많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곳에서 펼쳐졌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내릴 때까지, 사회적·문화적·정치적 각성이 일어나고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었던 그 모든 순간에 손택이 있었다. ‘지금 여기’의 대응적 시공간으로서 ‘그때 거기’에서 수전 손택이 보여준 가공할 존재감과 영향력은 오늘의 세계에 무엇이 부재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반지성주의와 소셜미디어가 결합한 시대에 어쩌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존재, (수전 손택으로 대표되는) 매혹과 권위를 두루 갖춘 비판적 지식인이다.
그러나 이 부재의 감각은 ‘최후의 지식인’이 되어버린 당대의 수전 손택이 직면해야 했던 조건이기도 했다. 그는 현대보다 더 높은 기준으로서의 과거, 예언자의 권위를 갖춘 지난날의 지식인들로부터 동시대 윤리의 근원을 찾고자 했다. 그의 동기는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공표했을 정도로 강했다. 도덕의 심급審級으로서 정치와 선동, 예술과 자본, 질병과 의료, 취향과 스타일, 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명성과 영향력에 관한 수전 손택의 통찰은 재현할 수 없는 20세기의 유산이지만, 그가 몸소 증명한 것처럼 현대의 정전正傳으로도 여전히 유효하다. 글항아리는 두 차례에 걸쳐 과거의 기억이자 현대의 기준이 된 수전 손택의 삶과 시대를 오늘의 독자에게 소개한다.
첫 책 『수전 손택: 영혼과 매혹Susan Sontag: Geist und Glamour』은 독일의 비평가 다니엘 슈라이버가 손택 사후 펴낸 첫 평전으로, 손택의 일대기를 중요한 분기점에 따라 연대순으로 그리며 그가 완성하고자 했던 문학가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하나의 프로젝트로서 조명한다. 다방면에서 활동한 수전 손택의 작업 목록이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은 물론, 수전 손택 프로젝트에 일조하거나 참조되었던 당대 지성과 뉴욕 보헤미안 세계의 지형도를 망라하며 균형 잡힌 시선으로 생애와 업적을 갈무리한다. 2020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두 번째 책 『수전 손택: 삶과 일Sontag: Her Life and Work』(근간)은 전기작가 벤저민 모서가 방대한 자료 조사와 함께 그동안 접근이 제한돼 있던 개인적 기록들과 이제껏 공적으로 손택과의 관계를 언급한 적이 없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을 직접 인터뷰해 20세기 지식인 중 가장 매혹적인 삶을 산 인물의 끝 모르는 복잡성과 눈부신 생애를 고스란히 담아내 ‘수전 손택 평전’의 결정판으로 불린다.


알지 못했던 수전 손택
기획된 정체성과 삶이라는 프로젝트

수전 손택의 삶에는 전기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국면이 있다. 뉴욕 중산층 유대계 가문에서 태어나 투손, 애리조나를 거쳐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의 유년기-청소년기. UC 버클리를 거쳐 시카고대에서 학문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후, 필립 리프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데이비드 리프를 출산한 청년기. 유럽 유학 후 미국으로 돌아가 결혼생활과 학계에 속박된 삶을 완전히 청산한 뒤 마침내 수전 손택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에 걸쳐 경주해간 지성과 관능Geist und Glamour의 여정.
이 책은 20세기 문화의 중심, 지성의 정점에서 펼쳐진 수전 손택의 생애를 삶이라는 프로젝트로서 조명한다. 다니엘 슈라이버는 책 전반에서 특정 시기의 특정 사건, 특정 인물들이 그 프로젝트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그에 기여했는가를 광범위한 참조, 엄격한 균형감각과 군더더기 없는 정연함으로 분석한다. 그럼으로써 국내에도 여럿 소개된 작품과 인터뷰, 사후 출간된 두 편의 일기를 포함해 손택 자신의 기록과 증언만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또 다른 수전 손택의 모습을 그려낸다. 일평생 강렬한 지적 자극과 경험을 갈망하며 무한한 관심사와 학구열로 문화와 유행을 선도한 손택은, 한편으로 명성과의 뿌리 깊은 갈등 속에서 삶을 신화화하는 성향을 보였다. 손택이 공적 활동을 통해 보여준 자아, 우리가 아는 수전 손택의 모습은 그가 바라고 열망하던 자아, 사회가 그에게 부여하고 덧씌우고 견디게 한 자아는 물론 그의 내면을 구성했던 모순된 자아들을 모두 아우르는 크고 복잡한 정신의 일부밖에 보여주지 못한다. 슈라이버는 여러 인터뷰와 삶의 기록, 주변의 증언을 근거로 손택의 모순적인 면모―단호함 뒤에 가려진 우유부단함, 위풍당당함을 떠받치던 불안과 두려움, 권위 위로 드리운 책임감,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했던 신랄함과 오만함, 동시에 그들에게 설렘과 희열을 안긴 카리스마와 품위, 서로 모순되는 여러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운명 앞에서 스스로를 가차없이 대했던 태도―에 주목하며 그를 한층 입체적인 인간으로 조명한다. 수전 손택 프로젝트는 서구의 위인과 당대의 지성, 빛나는 연인들을 포함한 수많은 인물에 의해 진척된 것이지만, 그 수많은 인물상의 중심에는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수전 손택의 자기모순을 뛰어넘는 자기창조가 존재했음을, 다니엘 슈라이버는 충실한 전기傳記의 문법으로 드러낸다.


수전 손택이라는 이름으로

유명 영화배우 이름처럼 두운이 맞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수전 손택은 이내 스스로를 지적이고 세련된 세계의 시민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수전은 넘치는 열정과 아이다운 믿음을 스스로 평생에 걸쳐 길러나간 온갖 이상과 관심사, 품행과 야망을 아우르는 ‘수전 손택 프로젝트’에 쏟아부었다.(55)

수전 리 로젠블랫Susan Lee Rosenblatt은 1933년 1월 16일 유대계 미국인 잭 로젠블랫, 밀드러드 로젠블랫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잭 로젠블랫이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후 홀로 미국으로 돌아온 밀드러드가 미군 대위 네이선 손택과 재혼해 꾸린 가정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소시민 가족이었다. 『작은 아씨들』과 마리 퀴리 평전, 세계문학 전집과 백과사전을 탐독하던 외롭고 지적인 변두리 소녀는 “지성과 고급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구분 짓는 도구로, 즉 주변의 ‘얼간이들’ 틈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법을 익혔다”.(58-59) 밤이 되면 손택은 눈이 따가울 때까지 뉴욕 지성계의 소설과 잡지를 읽고, 일기를 썼으며, 용어를 공부하고 외국어 단어 목록을 작성해가며 어휘력을 키웠다. “아이라는 게 너무 짜증이 나서”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늘 분주했다는 말대로, 그는 스스로를 맹렬히 밀어붙여가며 성인기에 진입했다. 다른 청소년들이 낭만적인 만남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삶이라는 프로젝트를 위한 기준이 확고했던 손택에겐 또래처럼 질문과 체험, 시행착오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1948년 12월, 열여섯 번째 생일을 눈앞에 두고 손택은 고등학교를 한 한기 앞당겨 졸업한다.

“『파르티잔 리뷰』를 집어 들어 라이어널 트릴링이 쓴 「예술과 운Art and Fortune」을 읽는 순간 전율이 일었어요. 그 이래로 제 꿈은 어른이 돼서 뉴욕으로 이주한 다음 『파르티잔 리뷰』에 글을 싣는 것이었습니다.”(수전 손택, 61-62)

손택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곧장 시카고대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마침내 숨 막히는 유년기의 조건을 뒤로하고 본격적인 지성의 교류를 시작한다. 손택은 노벨상 수상자를 수없이 배출한 이곳에서 탁월한 교수들의 카리스마 넘치는 강의를 감탄하며 들었고, 미국적 모더니즘이 꽃을 피우던 그리니치빌리지의 보헤미안 사회를 처음 접했다. 사회학 강사 필립 리프와 결혼한 뒤 아들 데이비드 리프를 출산한 손택은 남편의 프로이트 연구를 도우며 코네티컷대와 하버드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가정에도, 학계에도 지적이고 탁월한 여성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결혼, 그리고 그 계약의 일부인 학자들의 사교계는 손택의 삶을 점점 더 옥죄기만 했다. “후식을 먹고 나면, 남자들은 자리를 옮긴 뒤 시가를 피우며 철학이나 대학 정책을 논했고, 그동안 아내들은 자리를 지키며 자기들끼리 어울렸다. 젊은 손택은 다른 아내들과 무엇에 관해, 어떻게 대화를 나누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 리프의 머릿속엔 대가족이, 손택의 머릿속엔 대도서관이 있었다.”(86-88)
유럽 유학은 이 어긋난 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곳에서 손택은 동성 연인 해리엇 소머스를 만나고, 파리의 사교계를 종횡무진하며 스스로 부정해온 모든 욕망과 가능성과 쾌락을 받아들인다. 억눌러왔던 자신의 성격을 탐구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청소년기를 살며 새로운 인격,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던 그는 이곳에서 아카데미의 관습과 규율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 지식인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작가로서의 야심을 정식화한다. 1958년 뉴욕으로 돌아온 손택은 공항에 마중 나온 리프에게 그 자리에서 이혼을 통보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급진적이었던 변화는 더 이상 학자로 눌러앉지 않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되었다.”(수전 손택, 『강조해야 할 것』, 365)


작가의 탄생, 명성과 아우라

데이비드를 데리고 뉴욕으로 이사한 손택은 ”갖가지 생업과 적극적인 문화생활, 수많은 연애, 양육, 작가로서 경력 쌓기를 마치 곡예하듯“(116) 해낸다. 이 시기 해리엇 소머스를 통해 급속히 인맥을 확장한 손택은 일생토록 사랑한 마리아 아이린 포네스와 인연을 맺고, 처음으로 여성에게 성적 욕망을 느낀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손택은 포네스와 함께 글쓰기에 몰두하며 첫 작품 『은인』을 써나가기 시작한 후, 80쪽까지 쓴 원고를 들고 출판사 몇 곳을 돌아 굴지의 출판사 패러, 스트로스 앤드 지루FSG의 편집장 로버트 지루와 계약을 맺는다.
수전 손택의 전작全作을 출판한 FSG의 발행인 로저 스트로스는 손택의 스타성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한나 아렌트 등 유명 작가들의 유려한 추천사 대신 스물아홉 손택의 사진을 첫 책 『은인』의 뒤표지 전면에 실었다. 스트로스는 손택이라는 신예를 국제적인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가진 인맥과 평판을 총동원해 주요 언론사와 대중잡지, 해외 출판사와 접촉했고, 노벨상 수상 작가들과 출판인, 기자를 불러모은 파티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손택을 소개했다. 이곳에는 손택이 숭배하던 문예지 『파르티잔 리뷰』의 편집장 윌리엄 필립스도 있었다.
손택은 이 만남을 계기로 1964년 『파르티잔 리뷰』에 전설의 에세이 「‘캠프’에 관한 단상」을 발표한다. 지금까지도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이 에세이 한 편으로 그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손택의 캠프 개념은 에세이가 발표된 지 몇 달 만에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행어가 됐다. 『뉴욕 타임스』는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갑자기 수전 손택이 거기에 존재했다. 그는 알려진 게 아니라 선포됐다. (…) 그는 겸손을 떨며 머뭇머뭇 지성계로 들어선 게 아니었다. 색종이가 흩날리는 퍼레이드에 둘러싸인 채 어디선가 불쑥 나타났다.”(163) 같은 해 말 『에버그린 리뷰』에 발표한 「해석에 반대한다」로 캠프에 이어 예술의 성애학이라는 일탈적 담론을 또다시 문화계 복판에 끌어들인 손택은 두 에세이가 실린 비평집 『해석에 반대한다』 출간 후 뉴욕 지성계의 새로운 감수성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스스로 문화적 소양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수전 손택의 에세이를 읽었다. 우월한 지성, 강한 자의식은 아름답고 세련된 외모, 특유의 권위적 카리스마와 만나 그 이미지를 더욱 견고하게 굳혔다.

손택의 첫 잡지 인터뷰도 그의 글과 마찬가지로 논란을 낳았으며, 여기에는 맨발에 청바지를 입은 젊고 중성적인 여성이—때로는 생각에 잠긴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문설주에 기대 선 사진이 함께 실렸다.(179)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손택의 생활에는 바뀐 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한 주에 스무 편의 일본 영화를 보고, 프랑스 소설 다섯 편을 읽었다”.(185) 손택은 지적 기준에 대한 고집이 확고했고, ‘멀리해야 하는 종류의 유명세’가 무엇인지도 잘 알았다. 그렇게 그는 대중매체가 부여한 ‘미스 캠프’ ‘유행을 아는 여자’ ‘재색을 겸비한 셀러브리티’ 따위의 역할을 단호히 거부했다. 대신 반전운동과 체제 비판에 자신의 명성을 걸었다. “손택은 이름이 없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행사에 참여할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유명세야말로 그가 이 운동에 투자해야 하는 자산이었다.”(197)
동시대 미국 청년 좌파의 분위기를 탁월하게 요약한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폭격이 계속되던 시기 북베트남을 여행하고 쓴 에세이 「하노이 여행」을 포함한 에세이집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과 두 번째 소설 『살인 도구』를 발표한 후 손택의 삶은 “만성적인 우울증, 작가로서 극심한 슬럼프, 심각한 재정적 불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인기에 대한 근본적인 애증으로 점철됐다”.(213) 그는 초기로 분류되는 이들 에세이의 정치적 입장과 거리를 두었고, 25년간 소설을 쓰지 않았다. 작가로서의 삶을 제쳐둔 손택은 언제나의 꿈이었던 자기 영화를 만드는 데 집중했고, 사랑에 빠졌고, 매료되었던 국가들을 여행하며 “자신의 깊은 수렁 바깥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하고 있었다”.(251)


『사진에 관하여』와 『은유로서의 질병』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던 시절 언론 인터뷰에서 “더 이상 에세이를 쓰지 않는다” “마지막 에세이는 마지막 담배”라고 말했던 수전 손택의 귀환을 알리며 미학적·지적 위기의 돌파구가 된 작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에세이였다.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로 두 번째 명성의 물결을 맞이했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다면적이고 치밀하게 분석한 여섯 편의 에세이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각도에서 사진의 생태학과 그 힘이 미치는 범위를 분석한다. 손택은 이 책으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고,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한편 사진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하기를 거부한 이 책이 출간된 후, 절친이었던 피터 후자를 비롯한 많은 사진작가가 수전 손택에게서 돌아섰다.) 그러나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사진에 관하여』는 “억지로 마음을 돌려” 써야 했던, 삶의 현실로부터 미칠 듯이 멀리 떨어진 책이었다.(수전 손택, 『수전 손택의 말』, 29)
이제는 신화가 된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 전시회를 관람한 후 사진이라는 매체를 다루는 작업에 착수한 손택은 정기검진에서 상당히 진행된 유방암을 발견한다. 30년간 이어진 질병과의 투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손택은 “유방암에 관한 모든 자료를 찾아내 읽기 시작했다. 의학서와 기사를 비롯해 미국과 유럽의 의학 학술지에서 유방암과 관련된 논문까지 샅샅이 찾아내 모조리 읽었다. 종양학자도 닥치는 대로 만나서 자신의 상황을 논의했다”.(266) 그는 유방을 완전히 절제하고 다섯 번의 후속 수술과 고용량 항암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거동이 가능한 날이면 매일 밤 오페라를 관람하거나, 지인과 저녁 식사를 하고, 펑크클럽을 찾았으며, 영화와 연극을 감상했다.

“죽게 되리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안에는 엄청난 공포와 함께 극도의 행복감이 있죠. 무엇보다 강렬한 이 경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그 친밀함에 손을 뻗게 됩니다. 이 경험은 심지어 잘리고 추해지고 고통스럽고 쇠약해져버린, 손상된 몸으로 시들어가는 동안에도 더 고양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격정적이고 사납고 강렬하죠.”(수전 손택, 267)

바로 이 시기에 손택의 생산성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진 비평을 탈고하는 동시에, 질병에 관해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물이 손택의 기념비적 작업으로 남은 파토그래피 『은유로서의 질병』이다. 손택은 이 책으로 ‘환자들을 위한 운동가’가 되었다. 그는 투병 회고록을 쓰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암이라는 질병의 문화사를 관통하는 지적인 롤러코스터였을 뿐 아니라 암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달라는 절박한 탄원이기도 했다.”(274) 손택은 환자로 축소될 수 없는 고유하고 독보적인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지성과 현실에 입각해 암이라는 질병을 이해하고 정복하고자 했으며, 이런 생각을 다른 암 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격려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누고자 했다. 방대한 지식 위에 날카로운 논박을 쌓고 특유의 권위적 어조로 외면할 수 없는 메시지를 던진 『은유로서의 질병』은 전 세계 의료계와 환자를 포함한 폭넓은 독자층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최후의 지식인

에세이집 『우울한 열정』 출간 후 “에세이 형식의 도움을 받아서 할 수 있는 게 한계에 다다랐다”(301)고 말한 손택은,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서 이미지를 재정립한다. 이 이미지는 개인적 관심사와 동시대의 사회·문화 풍경을 종합적으로 개관하는 작업, 그리고 일련의 정치 활동이라는 두 갈래로 구성되었고, ‘래디컬 시크’ 시절의 청년기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손택은 새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대중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지식인’이라는 단어가 나쁜 인상을 주고, 심지어 경멸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시대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겸비한 과도기적 인물로서 그는, “향수의 대상이자 새로운 충동의 창조자였으며,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자 지성을 갖춘 새 시대의 미디어 스타였다.”(290)
『에이즈와 그 은유』를 발표한 후 손택은 출판 에이전트 앤드루 와일리를 만나 오랜 경력과 확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가져본 적 없던 경제적 안정을 확보한다. 사생활과 재정 상태가 안정된 가운데 집중력을 발휘해 써 내려간 장편소설 『화산의 연인』은 이전의 누보로망 스타일을 벗어던지고 ‘잘 읽히는 문학’으로 훈훈한 성공을 거두었다. 헬레나 모제예프스카의 삶을 통해 유럽과의 관계를 재정립한 전기소설 『인 아메리카』는 표절 논란과 엇갈린 평가에도 불구하고 전미도서상을 수상하며 마침내 소설가로서의 영예를 그에게 안겼다.
‘영속적인 파멸의 시대에 정신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초기의 소명의식을 여전히 굳게 쥐고 있었던 손택은 폴란드 노조탄압에 저항하고 동구권의 공산주의 정권을 격렬히 비판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펜 아메리카 위원장 역임을 계기로 이란의 살만 루슈디, 중국의 베이링을 포함해 탄압받는 전 세계 작가와 반체제인사를 해방시키는 인권운동에도 앞장섰다. 점령당한 사라예보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은 유명하다. 2001년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에서는 시상 측인 이스라엘의 정착 정책을 비판하며 ‘말의 양심’을 언급했고, 9·11 직후에는 “살인자들은 비겁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며 부시 행정부의 전쟁 선동을 비판했다. 손택은 이 일로 언론과 대중, 심지어 진보 지식인들에게까지 비난과 조롱을 받는다. 오늘날에도 인용되는 성찰의 목소리(“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를 낸 대가로 그가 살해 협박까지 받아야 했단 사실은, 애국심과 복수심에 경도된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손택은 이런 시국에서 고국을 비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미국의 양심,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뒤이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유작이 된 『타인의 고통』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책은 이라크전 발발과 동시에 출간되었고, 그보다 더 시의적절할 수 없는 시기에 다시금 수전 손택의 존재감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평가는 그 영향을 잘 요약해 보여준다.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던 유형의 인물이 미국인 수전 손택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반체제 지식인이다.”

“수전은 자기가 가진 지성의 힘을 수많은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단지 개인으로만 살아가기를 거부하기로 했죠. 이것은 수전에게 실존적인 딜레마였고, 그는 다른 작가들과는 달랐어요.”(네이딘 고디머, 324)

2004년 3월, 손택은 네이딘 고디머와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와 몸에 이유 없이 수많은 멍이 든 것을 발견했다. 손택은 공황발작을 일으킨 이 엄청난 충격을 ‘아마겟돈’이라고 표현했다. 성공 확률이 낮지만 유일한 가능성이었던 골수이식을 선택한 그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사후 발간된 『문학은 자유다』에서 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증언했듯, 손택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한 불안을, 적어도 작품은 자신보다 더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환상으로 달래는”(404) 작가였다. 그에게는 실제로 끝내지 못한 프로젝트가 너무나 중요했고,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치료와 혹독한 후유증 끝에, 마지막으로 시도한 실험적 치료도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 몇 주를 의식불명 상태로 보낸 손택은 2004년 12월 28일 아들과 가까운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수전 손택이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은 ‘위대한 도서관을 위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영미권에서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롤랑 바르트, 에밀 시오랑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뿐 아니라 살바토레 사타, W. G. 제발트, 후안 룰포, 마샤두 지 아시스, 다닐로 키시, 아담 자가예프스키, 비톨트 곰브로비치, 레오니드 칩킨,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마리나 츠베타예바, 안나 반티, 빅토르 세르주, 하들도르 락스네스 등 전 세계 수많은 작가의 작품을 헌신적으로 소개하고, 열정적으로 찬미했다. 작품 자체에 대한 비평과 함께 작가의 소명에 특유의 관점을 부여한 손택의 홍보 활동 덕분에, 많은 비영어권 작가가 세계 독자를 확보하는 기회를 누렸다. 다니엘 슈라이버는 “손택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후안 룰포와 같은 작가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다른 작가의 책도 표지에 손택이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절대로 그처럼 많은 독자를 확보하지 못했을 것”(385)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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