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낮게 내려온 무지개는 처음 본다네, 아름다운 파라솔 무지개
유강희 시인의 다섯 번째 동시집은 할매가 펼쳐 놓은 파라솔의 살대를 타고 내려온다. “이렇게 낮게 내려온 무지개”를 “처음 본” 할매는 “이 기특한/ 무지개가 도망가지 못하게/ 비닐 한 장 더 얹어 꽁꽁” 싸맨다. 찾아온 시를 환대하는, 장난스럽게 붙잡아 매는 야무진 손길로 한 권의 동시집이 꾸려졌다. 두 권의 시집(『불태운 시집』 1996, 『오리막』 2005)을 낸 유강희 시인이 2010년 첫 동시집 『오리 발에 불났다』를 펴내며 동시 동네에 즐거운 충격을 던져 준 지 11년 만이다. 그동안 유강희 시인은 동시의 소재나 독자층을 넓히고(『지렁이 일기 예보』) 독특한 형식적 실험을 모색하며(『손바닥 동시』)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그런 유강희 시인이 『무지개 파라솔』 아래 차려 놓은 세계는 어떤 색깔일까. 서정의 본연 한가운데에 여전히 단단하게 자리한, 현재의 아이들과 투명하게 교감하는, 만물의 새로움을 민감하게 알아채는 시인이 동시와 함께 걸은 그간의 언어들이 꾸러미 꾸러미 살뜰하다.
수천 수만 수억 개의 빗방울 중
내 이마를 처음 토독, 두드린 빗방울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화장실로 달려간 다음” 들여다 본 변기 안의 “오늘 첫 번째 상품”(「위대한 똥」), “오늘 아침/ 학교 가다” 본 “바닥에 떨어진/ 우유 한 방울의/ 또록또록 빛나는” 눈망울(「우유 한 방울」), “수천/ 수만/ 수억 개의 빗방울 중, ⃫내 이마를 처음 토독, / 두드린 빗방울”(「위대한 숙제」). 시인은 가장 먼저, 처음으로 우리를 두드리는 존재들에게 눈을 맞춘다. 풍덩 울리는 청명한 탄생의 소리는 순수한 기쁨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작은 존재의 간절한 바람은 우리가 세상에 빚진 것들을, 이마가 처음 받아낸 물방울은 미지의 인연이 끌고 오는 긴장감을 일깨운다.
그런가 하면 「걱정 인형」 안에는 기념품 가게에서 본 걱정 인형을 사지 않고 와 버린 것 때문에 처음으로 걱정이 생겨 버린 화자의 웃픈 사연이, 「1억 년 전 개구리」 안에는 호박 속에 갇혀 있는 개구리 네 마리를 보고 지금까지 상상해 보지 못했던 차원의 시간성을 처음으로 깨달아 버린 화자의 골똘한 마음이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세계 최초로 코끼리 발을/ 들어 올린 용감한 개미”(「코끼리와 개미」)는 우쭐하지 않고 가던 길을 부지런히 간다. 스스로는 태연하지만 발견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호박의 결정만큼 단단한 외연을 넘나들며 무섭게 팽창하는 이 많은 처음들이 시인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한창 만발한 세계, 미래에 더욱 확대될 세계
“유강희 시인의 시는 숲속에 있었어. ‘작은 것들의 세계’에. 그 세계에서는 주로 혼자였어. 그래서 벌레와 꽃, 새들의 친구였어. 그런 유강희 시인이 『무지개 파라솔』에서는 집을 짓고 마을로 왔어. 집에는 사람이 있지. 아기가 있어. 아기는 유강희 시인을 관찰자에서 체험자로 바꿔 버리지. 이 세계는 지금 한창 만발한 세계야. 유강희 시인은 가끔 방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몽상에 빠져들어. 현실이 떠받치고 무의식이 개입되는 이 풍요롭고 매력적인 세계는 미래에 더욱 확대될 세계야.”
김개미 시인의 해설을 보면, 유강희 시인은 아기와 만나며 세상의 많은 처음들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 것 같다. 한 개인의 세계를 통째로 바꾸어 버리는 압도적인 사건인 동시에, 끊이지 않는 발견의 나날들이자 고단한 일의 연속인 시간들을 경험하며 시인의 눈은 그동안 없던 세계를 탐험한다.
“어쨌든 멍구야, 아는지 모르겠지만 어른에게 가장 크고 중요한 사람은 아이야. 아이를 사랑하는 일이 가장 행복하고 의미 있고 급한 일이야. 유강희 시인은 아기가 가져온 세계에 환호하고 있어. 즉각적이고 본능에 충실하고 속이지 않는 세계. 어른이 자라려면 이 단순한 세계가 필요해. 언어 이전의 것에는 거짓이 없으니까.”
「아기가 울 때」 「별 오줌」 「우유 한 방울」 「위대한 똥」 「아기구름보기」 「귀뚜라미」 등의 시 주위를 어룽어룽 감싸는 것은 엉뚱하고 신나는 세계, 고요하게 흐르는 사랑, 편안하기를 바라며 돌보는 마음, 편안함을 확인하며 안심하는 마음들이다.
“나도 좀 끼워 줄래? /유모차를 끌고 온/ 뚱보 아저씨가 /같이 놀잔다 ⃫우리는 일 학년, /아저씨가 불쌍해/ 같이 놀아 주기로 한다”(「안경 놀이」)
유모차를 끌고 온 아저씨, 안경도 썼으면서 안경 놀이도 할 줄 모르는 아저씨, 유강희 시인이 발견한 마음들은 우리의 시선을 동심과 세계의 관계로 향하게 한다.
유구한 상상의 물동이에서 출렁출렁 길어 온 신나는 이야기들
개미나 여치, 오도개, 들나물, 오리와 나팔꽃의 친구인 유강희 시의 바탕은 “단순해 보이지만 사물의 핵심을 향해 육박해 들어가는 직관” “여리고 힘없는 자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지 못하는 다감한 연민”(손택수, 『뒤로 가는 개미』 해설)이다. 그의 시 세계를 언제나 단단하게 받치고 있는 이 지점은 여전하지만, 『무지개 파라솔』에서 새로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한층 더 멀리 달려나가는 상상의 지평이다. 보이지 않는 향기의 달음박질 현장을 묘사한 「코뿔소」,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깨비 형제와의 문답을 담은 「돌덩이 수박」, 질문에 질문에 질문을 나열하며 공포와 유머가 섞이는 현장을 중계하는 「다시 무서운 꿈이 찾아오면」 등의 시는 자기 몸에 꼭 맞는 바람에 올라타 까마득하게 날아가는 연이 된 듯한 쾌감을 선사한다. 「감꽃 목걸이」가 묘사하는 아름다운 비감이나 「몽골 설화」가 담아내는 궁금한 세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공간이다.
시와 그림이 주고받는 무궁무진한 대화
『무지개 파라솔』의 그림은 그동안 『모모모모모』 『사랑은 123』 등의 그림책으로 이미지와 메시지의 다차원적인 교직을 보여 주었던 화가 밤코의 작업이다. 『무지개 파라솔』의 세계를 가장 먼저 궁금해하며 그 안에서 한참을 유희한 덕분에 시와 대화하는 그림들이 태어날 수 있었다. 발랄한 펜 선을 기본으로 실뭉치나 돌멩이, 스탬프, 여러 종류의 종잇조각, 사진 등의 재료로 위트 있게 구성한 이미지들은 시가 품은 마음들을 만화경처럼 즐겁게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