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일상을 돌보고 싶어지는 가뿐한 전환의 감각!
모든 존재의 진정한 안녕을 비는 소설가
김금희의 식물 산문 출간
일상의 순간에서 길어올린 깊은 통찰과 산뜻한 위트로 인간 내면의 지형도를 섬세하게 그려온 작가 김금희의 두번째 산문집 『식물적 낙관』이 출간되었다. 2020년 여름부터 2022년 겨울까지 한겨레 ESC에 ‘식물 하는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에세이에 더해, 당시에는 아직 연약해서 꺼내놓기 쉽지 않았던 작가 자신의 내면을 지긋이 응시하는 미발표 원고들을 담았다. 김금희의 발코니 정원에 찾아온 연약하고도 강인한 식물들을 통한 깨달음의 기록이자, 식물을 매개로 만난 다정한 사람들과 만들어낸 환한 순간들의 기록이기도 한 이 책은 작가가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며 통과하는 사계절의 풍경을 따라간다. 그 풍경의 변화에 따른 마음의 굴곡 또한 김금희 산문만의 아릿하고도 부드러운 필치로 그려진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 책이 ‘소설가의 식물 산문’이라는 점이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 헤르만 헤세와 같은 대문호들이 찬미한 바 있는 식물이라는 존재를 지금 김금희가 사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2020)의 첫머리에 “글을 쓰지 않을 때면 으레 발코니에 나가” 식물을 돌보다 문득 “절박하게 하네, (…) 싸우듯이 하네”(서문 「안팎의 말들」)라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고 쓴 작가는 그뒤 3년간 모은 산문을 묶은 『식물적 낙관』에서 “돌아보면 내가 식물에 빠져든 시기는 마음이 힘들었던 때와 거의 비슷했다”(서문 「식물 하는 마음」)고 고백한다. 지난 3년 내내 지속된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시련, 공교롭게 맞물린 개인적인 상실과 삶의 부산물 같은 고민들을 겪으며 작가는 식물이 지닌 오묘한 치유의 에너지에 이끌렸을까.
이제 『식물적 낙관』에 이르러 김금희는 더이상 식물을 절박하게 대하지 않는다. 김금희의 소설이 삶을 향해 드러내는 특유의 온화하고 담대한 시선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이해에서 비롯되는바, 작가는 산문에서도 식물이 지닌 생명력과 특질을 명확히 관찰하고 이해해나가며 식물들의 느긋한 낙관의 자세를 받아들인다. 화분에 심긴 채 작가의 발코니에서 살아가는 실내 식물들은 함께 사는 인간이 현실적인 문제들로 고뇌하느라 여력이 없는 동안 척박한 환경에 놓이기도 하지만, 외부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생장만을 도모하면서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착실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복잡다단한 인간사에 초연한 채, 무언가를 해치는 일 없이, 각자의 본능적인 삶의 실천만을 이어가는 식물들이 이룩한 발코니 속 별세계를 묘사하는 김금희의 산문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주어진 현실을 단순하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자체를 삶의 명확한 목표로 재설정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삶 이외의 다른 선택지를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는 이러한 가뿐한 전환을 통해 일상을 보다 너그럽게 바라볼 때 찾아오는 삶에 대한 효능감. 그것이 바로 ‘식물적 낙관’의 감각이다.
인간과 함께 계절을 순환하는 존재들이 선사하는
아름답고 느긋한 낙관의 에너지
네 개의 부로 구성된 이 산문집의 리듬은 계절의 느슨한 순환을 닮았다. 명확히 구획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풍경의 변화가 편편의 글 사이에서 감지된다.
1부 ‘여름 정원에서 만나면’에는 작가의 발코니에 서식하는 식물들이 더위와 습한 대기를 통과하며 보여주는 혹독하고도 왕성한 성장기가 그려진다. 인위적으로 개입하기보다 식물들이 원하는 만큼 무성해지면서 자유분방한 성장을 즐기도록 하는 이 발코니에서는 김금희와 식물들 간의 꾸밈없는 대화가 이루어진다. 어쩌면 인간의 역할은 여름을 앓는 존재들을 지켜보며 함께 앓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역설적으로 안도감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생명에 대한 든든한 믿음을 안겨준다.
2부 ‘이별은 선선한 바람처럼’에는 가을바람과 함께 환기되는 상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산문이 묶였다. 작가가 반려견과 반려식물들을 떠나보낸 후 무너졌던 마음을 다독여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이 눈부시다. 하나의 식물이 지닌 삶의 무게를 헤아리고, 살아 있는 존재들이 보이는 변화의 기척에 경탄하며, 작가는 예비되어 있는 또다른 상실을 마주할 힘을 마련한다. 첫 산문집에서 소설로 다 할 수 없었던 내밀한 고백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주었던 김금희가 ‘나’에서 출발하는 글쓰기를 지나 식물을 경유하는 글쓰기를 통해 낯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내는 싱그러운 여정이 펼쳐진다.
3부 ‘겨울은 녹록하게’에는 성장을 잠시 멈추고 나중을 기약하며 거센 추위를 견딜 힘을 비축하는 식물들의 모습이 따스한 시선으로 묘사된다. 생의 사이클 하나를 완주해낸 뒤, 한 해 동안 이루어낸 변화를 축하하고 남은 아쉬움을 뒤로하며 스스로를 격려하는 모습은 식물과 인간이 다르지 않다. 기온의 변화에 따라 식물이 보내는 신호를 기민하게 살피며 화분들에 더욱 따뜻한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때를 기다리는 작가의 모습에서는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을 향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4부 ‘그런 나무가 되었다’에는 긴 겨울의 끝에 당도한 봄날 다시금 몸을 꿈질거리기 시작하는 식물들의 밝은 기운이 담겼다. 김금희가 묘사하는 연둣빛 봄 풍경은 그 자체로 희망차다. 어느덧 연한 햇빛을 받으며 넘실거리는 나뭇잎들로 가득찬 창밖, 메말랐던 식물들이 가지에 조그맣게 핀 여린 잎으로 보내는 생존의 기척 등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도 어딘가 지난 계절들과는 달라진 듯하다. 4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깊은 숲을 응시하는 동안 아픈 감정들은 발화되는 대신 다시 내면으로 스며들고, 그 과정을 오롯이 느끼며 작가는 식물과 교류하는 동안 더욱 단단해진 자신을 확인한다.
부록 ‘식물 군상’은 김금희가 지금까지 만난 식물 중 30종을 추려 자신의 언어로 직접 소개하는 코너이다. 이름에 얽힌 사연, 특징적인 모습, 최적의 성장 환경, 기를 때 주의해야 할 점, 기르면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의 종류 등 식물에 대한 다채로운 정보가 작가 나름의 경험에 비추어 서술된다. 이제 막 식물을 가족으로 들인 독자에게는 실증적인 조언을, 식물과 함께 다양한 경험을 쌓아온 독자에게는 지극한 공감을 안겨준다.
『식물적 낙관』에 수록된 일러스트는 경북 상주로 귀촌해 자연이 지닌 안전한 색감을 포착해온 일러스트레이터 라킷키(Lakitki)의 작품이다. 그의 그림은 식물 본연의 편안한 모습에서 인간의 마음의 안녕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김금희의 글과 어우러져 이 책에 더욱 건강한 기운을 불어넣어준다. 펼치는 페이지마다 숨이 트이고 마음이 넓어지는 듯한 환한 풍경이 담긴 이 산문집은 식물과 함께하는 낙관적인 삶을 위한 다정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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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적 낙관』은 가드닝에 관한 안내서는 아니다. 일상의 다양한 주제를 담은 여느 형식의 산문집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산문 작업을 할 때보다 자유롭게 썼다는 생각이 든다. 식물에 대해 말하려 하자 마음은 더 쉽게 열렸고 소설 속 인물 뒤에 숨어 있던, 사실은 내 것이었던 기억들이 잎맥처럼 그려졌다. 이 년 동안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나는 감추어두었던 산문 속 자아가 자기방어를 뚫고 서서히 나오는 것을 느꼈다. 식물 집사로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참 괜찮은 가드닝 시간이었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_김금희, ‘나오는 말’에서
식물을 돌보는 일이 우리 자신을 돌보는 일과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닫는다. 내일이면 더욱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과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한 매일의 노력들이 없다면 우리 삶이 계속될 수는 없으리라. 이 건강한 힘을 이 책은 ‘식물적 낙관’이라 표현한다.
소설을 통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그러나 도저한 다정함으로 우리 삶을 살피던 김금희는 이 책에서 식물을 살피는 일이 어떻게 우리 삶에 대한 낙관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준다. 식물을 키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깊게 공감할 크고 작은 일들을 따라 읽다보면, 당신은 때로 웃기도 하고, 또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을 낙관할 힘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_황인찬(시인)
■본문 중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가드닝의 아름다움은 기실 상상에 가깝고 오히려 성장의 개념을 왜곡하는 측면이 있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그렇게 누군가의 주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
그래도 나는 식물을 계속해서 기르고 식물 이야기를 쓸 것이다. 발코니에 나가 있을 때 내 안에서 은은하게 일렁이는 마음들의 정체가 궁금하니까.(서문 「식물 하는 마음」, 10~11쪽)
인간인 나는 파악할 수 없는 이 공간의 특질과 에너지를 찾아내 열심히 적응하고 성장한 식물들.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내 가까이서 그 일을 해낸 식물들 덕분에 나도 용기를 얻었다.(「잘 자라는 일」, 61쪽)
결국 식물을 기르면서 내가 하는 일이란 대체로 일상과 겹쳐 있다.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야말로 가장 오래갈 마음이 아닐까. 준 것을 특별히 기억하지 않는 완전한 습관으로서의 돌봄, 혹은 사랑 같은 것 말이다.(「집사 일기」, 83쪽)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조건은 한정적이고 우리는 절대 살아 있는 것들의 완벽한 관장자가 될 수 없다.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그런 공백 때문에 어떤 식물은 자라고 어떤 식물은 성장을 멈춘다. 그러니 빛, 바람, 물이라는 답은 가드닝의 수많은 실패자들을 북돋우고 자책에서 구해내는 치유의 말일지도 몰랐다.(「코로키아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 것」, 111쪽)
우리집에서는 식물들이 제각각 다른 집을 짓고 산다. 좀 비좁기도 하고 습하기도 하고 색도 낡아 있지만 그런 차이들에 아랑곳없이 뿌리를 내리고 적응을 해낸다. 차이는 결함이 아니라 그저 조건일 뿐이라는 사실을 식물들이 보여주는 것이다.(「새집 생활」, 201쪽)
식물은 자기 상태에 대한 미움이나 비난이 없다. 그리고 마음은 본래 그런 식물의 형태이지 지금 나를 옥죄어오는 이 나쁜 형태가 아니다.(「가능한 한 이팝나무에 가깝게」, 217쪽)
만약 식물에게서 매번 고통을 상상한다면 식물을 기르는 방식은 매우 왜곡될 것이다. 잎을 떨어뜨리거나 가지를 휘거나 적절한 시기가 되면 꽃을 말려 떨어뜨리는 식물의 행태는 식물의 방식대로 읽을 때 비로소 본질에 맞는 자연적 행위가 된다. 가드닝을 하며 식물과 나는 생존의 드라마를 함께 겪지만 그것은 인간인 내가 구성한 것일 뿐 사실 거기서 발생하는 상념들은 식물 자체와는 무관하다. 그 무관함, 발코니에서의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무관함이라는 생각을 한다.(「내일도 여여하다」, 224쪽)
식물에게는 지금 이곳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엄정한 상태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역설적으로 식물들의 낙관적 미래를 만들어낸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 성장할 수 있다면 환희에 차 뿌리를 박차고 오르는 것, 자기 결실에 관한 희비나 낙담이 없는 것, 삶 이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 그렇게 자기가 놓인 세계와 조응해나가는 것. 이런 질서가 있는 내일이라면 낙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나오는 말 「우리가 선택한 낙관」, 256~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