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의 반짝임이 실은 아프디아픈 별의 속엣생피라고…”
―문학인생 31년, 발생적으로 자연에 가까운 유강희의 시세계
1987년 스무 살 나이에 등단해 1996년 첫 시집 『불태운 시집』, 2005년 두번째 시집 『오리막』을 펴낸 유강희 시인. 13년이 지나 66편을 담은 세번째 시집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를 펴낸다. “삶이 자꾸 시를 속이려 들거나/ 혹은 시가 삶을 속이려 들 때마다/ 나는 우두커니 먼 데를 바라본다”라는 이번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추측해보자면, 자주 ‘우두커니 먼 데를 바라’보기 때문일까. 문학인생 31년, 10년에 한 번꼴로 시집을 묶을 만큼 과작이다. 그를 두고 시인 안도현은 “시인 중에도 자신의 속된 욕망을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애써 가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유강희한테서 그런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무한히 착하고, 매사에 지극하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를 높일 줄 아는 사람이다”라 말한 바 있다. 시인의 시 역시 그러하다. 우두커니 먼 데를 바라보다가 “별들의 반짝임이 실은 아프디/ 아픈 별의 속엣생피라고” “겨우/ 귀엣말”(「시인의 말」)하는 시. ‘겨우’에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다.
아직 던져지지 않은 돌
아직 부서지지 않은 돌
아직 정을 맞지 않은 돌
아직 푸른 이끼를 천사의 옷처럼 두르고 있는 돌
아직 말하여지지 않은 돌
아직 침묵을 수업중인 돌
아직 이슬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돌
그리고 잠시 손에 쥐었다 내려놓은 돌
아직 조금 빛을 품고 있는 돌
―「돌」 전문
시집의 문을 여는 시 「돌」의 방점은 일곱 번 반복되는 ‘아직’과 한 번의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아직’에 찍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저절로 된 그대로의 현상’이라는 ‘자연’의 사전적 정의를 일곱 번의 ‘아직’ 속에 시인은 그렸다.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태로서의 ‘돌’. 그것을 바라보던 화자는 그 돌을 ‘잠시 손에 쥐었다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돌에서 ‘빛’을 발견하는 것. 이는 이 시집 전체의 방향과 대상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고봉준의 진단처럼, 유강희 시인에게 시적 순간은 “‘빛’을 통해 도래한다. 물론 여기서의 ‘빛’은 광학적(optical) 현상과 무관하게 사물-대상에서 “제 몸안에 오래 가두어두었던”(「기러기의 최후」) 어떤 것이 흘러나오는 존재의 ‘발음’이다. (…) ‘빛=시’가 ‘문명’보다는 그것에 대한 성찰로서의 ‘자연’에 가깝다는 시론(詩論)으로 읽을 수도 있다”. 상기한 서시에서처럼 무심코 집었다가 내려놓은 돌에서 빛을 발견할 때, 가을 아침 나무 아래에서 발견된 매미 사체에서 빛을 발견할 때(「매미의 임종」), 개의 날카로운 이빨에 목덜미를 물려 죽어가는 기러기의 눈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할 때(「기러기의 최후」), 겨울 산골짜기에서 잣 한 송이와 돌 한 개를 발견하고 마음이 반짝거림을 느낄 때(「잣과 돌」), 늦은 밤 시창작 교실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빛이 느껴질 때(「밤의 시창작 교실」), 그리고 밤을 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빛나는 밤의 종교”(「아버지가 깎은 건 밤이 아니야」)를 발견할 때.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들이 시적인 장면으로 전환되며, 인간 삶의 생래적 비애를 넘어서는 ‘먼 데’로 우리를 잠시 데려간다.
돌의 팔은
얼마나 굵은가
바닥에
저를
내려놓기 위해
―「돌」 전문
잠시 쥐었다 내려놓았다던 그 돌은 사실 화자가 내려놓은 것이 아니었던 걸까. 시집의 첫머리와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배치된 시의 제목 역시 「돌」이다. 결국 유강희 시인의 지난 13년은, 돌 하나를 화자가 쥐었다 내려놓았다는 것에서, 돌 스스로 저를 내려놓았다는 깨달음으로 갈무리되는 것일지 모른다. 이렇듯 욕심 없고 사심 없이 써내려간 시들, 그 뭉근함이 시린 겨울을 맞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된 그대로의 현상’과 유기적으로 호흡하며 따스하게 섞일 수 있는 서정성을 선사하리라.
■ 시인의 말
삶이 자꾸 시를 속이려 들거나
혹은 시가 삶을 속이려 들 때마다
나는 우두커니 먼 데를 바라본다.
먼 데가 와서 나를 태우고
끝없이 날갯짓하여
부디 날 서럽지 않게
어디론가 더 멀리 데려가주기를,
그 먼 데는 그렇다면 새이어야겠다.
먼 데가 먼 데와 하나로 딱 붙어
사랑의 지극한 말씀이어야겠다.
하여 부질없고 헛되이 나는
별들의 반짝임이 실은 아프디
아픈 별의 속엣생피라고
그대 앞에 그제야 겨우
귀엣말할 수 있으리.
2018년 겨울
유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