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M. 쿳시는 소설과 에세이,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다재다능한 작가다. “현재 생존해 있는 영어권 소설가 중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유명하며 수상 이력이 많은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문학상과 더불어 영연방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맨부커상의 전신)을 최초로 두 차례 수상했고, 200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쿳시 작품세계의 정수가 인상적으로 드러나는 걸작이다. 어느 제국의 평화로운 변경 도시에 수도의 제3국 소속 경찰들이 파견되어 국경 너머의 야만인들을 잡아들이고 잔인하게 고문하는 일이 벌어진다. 변경을 통치하는 치안판사인 ‘나’는 고문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젊은 야만인 여자에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끌리고, 그로 인해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생각지도 못한 치욕을 겪게 된다. 치밀하게 짜인 서사를 통해 식민주의가 자행하는 억압과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되는 타자에 대한 폭력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걸작이다.
콘스탄틴 카바피Constantine Cavafy의 시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제목과 모티프를 빌려온 이 소설은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불분명한 무대를 전면에 내세운다.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과 폭력의 사슬에 주목하고 목소리를 내온 쿳시는 이 작품에서 특별히 남아프리카라는 특정 공간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식민주의로 인해 생겨나는 폭력과 억압의 사슬이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국한된 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일임을 강조한다. 이 소설의 제국주의자들이 ‘야만인들’에게 가하는 고통과 폭력과 그들이 조장하는 불안과 애국심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해묵은 것이다. 카프카와 포크너를 강하게 환기하는 이 작품은 인종 간의 잔혹 행위와 불평등에 대한 초현실적인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조지프 콘래드의 전통을 잇는 정치 스릴러. _스웨덴 한림원
나이든 치안판사인 ‘나’의 통솔하에 있는 평화로운 변경 도시에 야만인들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을 하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공포가 고조됨에 따라 수도에서 파견된 제3국 소속 졸 대령이 제국 수호의 최전선인 이 정착지를 시찰한다. ‘나’는 속마음으로는 제3국의 행보에 매우 비판적인데, 이 모든 소문이 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 때문에 생겨난 가짜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러한 꿈들은 너무 편해서 생겨난다. 내게 야만인들의 군대를 보여준다면야, 나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제3국은 민심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빨랫줄에 널어놓은 옷이 사라지거나 식료품이 없어지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야만인들이 몰래 다녀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공포에 떤다. 어느 소녀가 강간을 당하는 일이 생기자, 그녀의 친구들은 야만인의 소행이라고 주장한다. 범인이 갈대밭 속으로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는데, 못생긴 얼굴이 야만인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제3국은 “야만인들이 당신의 불알을 구워서 먹을 거요” 따위의 말로 사람들의 공포를 부채질할 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야만인들을 향한 미움의 근거가 식사 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사실 말고는 전무하다고 주장하는 치안판사의 말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국가의 수호자들이며 폭동 전문가들이고 진실의 신봉자들이며 취조 전문가들”인 졸 대령의 부대는 야만인들을 진압하러 출정한다. 그들은 성문 밖에서 물고기를 잡아 근근이 살아가는 힘없는 부족을 엉뚱하게 잡아들여 돌아와서는 시민들에게 야만인들은 실재하는 적임을 눈으로 확인시켜준다. 제3국은 계속해서 야만인들을 찾는답시고 소탕작전을 벌이지만, 제국에 위협을 주는 진짜 야만인은 단 한 명도 없고 국경 너머 힘없는 민간인들만 고문당하고 짓밟힐 뿐이다. ‘야만인’이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야만인’은 내부 문제의 원인을 상상의 외부인에게 돌리려는 국가의 손쉬운 해결책인 것이다. 쿳시는 이러한 제국의 속성을 시적인 문장으로 명료하게 포착해낸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제국은 낮에는 적들을 쫓아다닌다. 제국은 교활하고 무자비하다. 제국은 사냥개들을 이곳저곳에 파견한다. 밤이 되면, 제국은 재앙에 대한 상상을 먹고 산다.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이 강간당하고, 죽은 사람의 뼈가 산처럼 쌓이고, 드넓은 땅이 황폐해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상상이지만 전염성이 강하다. (219~220쪽)
미약한 속죄, 그리고 허위와 공모
졸 대령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해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다가 눈이 반쯤 먼 야만인 여자를 발견한 ‘나’는 그녀에게서 설명하기 힘든 매혹을 느낀다. 집안일을 해달라는 명분으로 그녀를 자신의 거처로 들이고는, 매일 밤 그녀의 몸을 씻겨주는 의식과도 같은 행위에 몰두한다. 비누로 거품을 내어 발가벗은 그녀의 몸을 씻기고, 물기를 닦아준 후에는 몸에 아몬드 오일을 발라 마사지한다. ‘나’는 그녀의 몸을 문지르는 동작의 리듬에 정신없이 빠져들고, 시간 밖에 존재하는 듯한 텅 빈 황홀감을 느낀다.
‘나’의 행동은 야만인 여자의 몸에 새겨진 제국의 폭력을 지워주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속죄의 몸짓이라고 할 수 있으나, 쿳시는 ‘나’와 같은 온정적 제국주의자의 허위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야만인’ ‘미개인’ 들에 대한 혐오가 편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고 있고 제3국이 자행하는 끔찍한 고문에 반대하다가 “국가의 적”으로 몰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제국에 봉사하는 ‘나’는 야만인 여자를 고문했던 자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니며 제국의 폭력성에 일정 부분 공모하고 있다. 야만인 여자를 목욕시키는 일에 빠져든 저의도 완전히 순수하지 않음을 그 스스로도 느낀다. “내가 그녀에게 끌린 건 그녀의 몸에 난 상처 때문이었는데, 그 상처가 충분히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실망했던 걸까?” ‘나’는 여자의 몸을 씻기며 상처를 지우려는 자신의 모습에서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부당한 만족감을 느꼈던 건 아닐까. 고문을 당했던 정황을 낱낱이 캐묻는 ‘나’의 질문에 “얘기하는 데 지쳤어요”라며 대답을 고사하는 야만인 여자는 ‘나’의 허위성을 진작 느꼈던 것이다.
그녀가 내 침대에서보다 채소의 껍질을 벗기면서 더 행복해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가 막사 정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을 조여오는 허위의 독기를 느낀 게 틀림없다. 욕망으로 가장한 질투심과 동정심과 잔인성의 허위 말이다. (…) 그녀는 처음부터 내가 허위적인 유혹자라는 걸 알았다. (222쪽)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선악의 단순한 이분구조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제국주의 폭력의 여러 면모를 다층적으로 살피는 위대한 작품이다. ‘나’는 “단 한 명의 의로운 사람”이 아니며,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달콤한 거짓말일 뿐이다. 졸 대령과 나는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나’와 졸 대령의 제국이 ‘야만인’에게 가하는 잔인한 폭력을 마주한 독자는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야만인’은 누구인가? 그들과 우리 중 누가 야만인인가?
추천사
쿳시는 지적인 힘과 균형적 스타일, 역사적 비전과 윤리적 통찰력을 독특한 방식으로 통합해낸다. _데이비드 애트웰(요크대학 교수)
진정 문학계의 사건이다. _뉴욕 타임스 북 리뷰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거의 모든 면에서 비범한 소설이다. 카프카와 포크너의 기억이 인종 간의 잔혹 행위와 불평등에 대한 쿳시의 초현실적인 우화를 통해 날아오른다. _워싱턴 포스트
쿳시는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어둠의 심연을 꿰뚫어보며,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괴물의 본성을 파악해낸다. _버나드 레빈(저널리스트)
다양한 관점을 매끄럽게 제시하는 쿳시의 필력은 눈부시게 빼어나다. _존 패스모어(철학자)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
펭귄 북스 선정 20세기의 위대한 책
본문에서
이 여자한테는 몸속이 존재하지 않고, 내가 이리저리 들어갈 곳을 찾아 헤매는 표면만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게 그녀를 고문했던 자들이 비밀을, 그들이 그게 무어라 생각했든 간에, 추궁하며 느꼈던 걸까? 처음으로 나는 그들에게 메마른 동정심을 느낀다. 몸을 지지고 찢고 베어서 다른 사람의 은밀한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얼마나 자연스러운 착각인가! 여자는 내 침대에 누워 있다. 하지만 굳이 침대여야만 할 이유는 없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연인처럼 행동한다. 나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몸을 씻겨주며, 그녀를 어루만지고, 그녀 곁에서 잠든다. 하지만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그녀를 의자에 묶고 두들겨팰 수도 있다. 그렇다고 덜 친밀해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_74쪽
왜 내 몸의 한 부분이 불합리한 욕구와 잘못된 기대감과 더불어, 욕망의 통로로서 다른 어느 부분보다 우선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때때로 성기는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나한테 기생해 살면서 제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고,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내 살에 달라붙어 사는 우둔한 동물인 것 같았다. 나는 물었다. 내가 왜 너를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데리고 다녀야 하지? 네가 다리 없이 태어나서 그러냐? 네가 나 대신 개나 고양이한테 뿌리를 박고 산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_78쪽
나는 생각한다. ‘혹은 어쩌면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내 입술이 움직인다. 소리 없이 말을 만들고 다시 만든다. ‘혹은 어쩌면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오직 살아내야 하는 건지 모른다.’ _108쪽
나는 소금 지대를 터벅터벅 걸으며, 내가 그처럼 먼 곳에서 온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건 낯익은 곳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내 침대에서 죽어, 옛친구들의 조문을 받으며 무덤으로 가는 것뿐이리라. _125~126쪽
나는 처음 감방에 들어와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건 큰 고통이 아닌 듯했다. 생각과 기억을 갖고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_142쪽
지금 이 순간 군중으로부터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해진 건, 막 일어나려고 하는 잔혹행위에 내가 오염되지 않아야 하며, 또한 가해자들의 무기력한 증오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죄수들을 구할 수 없다. 그러니 나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하자. 언젠가 누군가가 이 일에 대해 얘기하게 된다면,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하자. _172쪽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고통의 정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육체 속에서, 육체로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내게 보여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만 정의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쥐어잡히고 파이프가 목구멍 속으로 쑤셔넣어지고, 그 속으로 소금물이 부어져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고 몸부림을 치고 토하는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 싶을 정도로 빠르게 정의에 관한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육체로서 말이다. _190쪽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가 있지? 그게 가능하오? 나는 이 질문을 하고 싶소. 이건 사형집행인들이나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가 늘 물어보고 싶었던 거요. _2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