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이라 하면 흔히 유물 또는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관하며 전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뮤지엄의 패러다임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뮤지엄은 단지 작품 관람을 위한 공간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의 경험과 참여를 이끌어내고,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하며, 휴식과 영감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까닭에 뮤지엄에서 디자인의 역할과 기능은 점차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는 추세다.
『뮤지엄×여행』은 국립민속박물관의 디자인 담당 큐레이터이자 전시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지은이가 지난 10여 년 동안 세계 각지의 뮤지엄을 직접 발로 누비며 기록해온 여행기다. 공간 큐레이터는 공간 연출, 전시 방식, 커뮤니케이션 기법 등을 다루면서 뮤지엄의 콘텐츠와 관람객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공간 큐레이터의 관점으로 뮤지엄의 공간 미학적 특징을 발견하고 세계 여러 뮤지엄에서 몸소 겪은 아름다운 관람 경험에 대해 서술한다. 그리하여 기존에 역사와 유물 중심으로 해석된 뮤지엄 소개서나 관광 안내서에 실린 획일적인 내용과는 다른 신선한 시각으로 뮤지엄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은 무엇보다 뮤지엄이라는 장소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존 이미지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권한다. 뮤지엄을 “오래되고 고루한 물건을 진열해놓은 정지된 공간”으로 기억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지은이는 뮤지엄을 “과거이면서 현재이고, 또 미래의 장소”라고 주장한다. 과거의 유물을 담고 있지만 현재의 기법과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서로 다른 시대와 다른 문화를 연결해주고, 때로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뮤지엄의 변화된 기능과 확장된 역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반영한 견해이기도 하다.
11개 국가, 25개 도시, 38곳의 뮤지엄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을 넘나들며 만난 뮤지엄의 풍경과 이야기
『뮤지엄×여행』의 밑거름이 된 것은 ‘신디의 박물관 여행’이라는 지은이의 개인 블로그다. 그는 그곳에 전시 디자인 분야에서 실무를 해온 지난 10여 년 동안 자신이 방문했던 세계 각지의 수많은 뮤지엄을 차곡차곡 기록해왔다. 업무를 위한 출장에서, 연구를 위한 답사에서, 휴식을 위한 여행에서도 빼놓지 않고 뮤지엄을 방문했고, 이렇게 만난 좋은 뮤지엄과 훌륭한 전시는 에너지와 영감을 얻는 자양분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지은이가 방문했던 수많은 뮤지엄 중에서도 각별하게 기억되는 장소에 대한 기록을 보강하고 다듬어 완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책에는 열한 개 국가, 스물다섯 개 도시에 있는 서른여덟 곳의 뮤지엄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공간 미학적이고 디자인적인 관점으로 살핀 결과, 책에서 다룬 뮤지엄들은 주로 유럽과 미국, 일본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다른 국가들보다 일찍 뮤지엄의 역사가 시작되어 비교적 선구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지은이는 이 책에서 ‘박물관’ ‘미술관’이라는 말 대신 주로 ‘뮤지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역사적 유물, 예술작품, 학술자료 등이 주요 콘텐츠인 뮤지엄이 우리나라에서는 전시하는 대상에 따라 박물관, 미술관, 홍보관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뮤지엄이라는 원어가 가진 뉘앙스를 한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가령 미술관에서 고고학적 유물이 전시될 수도 있고 박물관에서 예술작품이 전시되기도 하는데 이를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박물관’이나 ‘자연사박물관’처럼 박물관으로 고착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뮤지엄이라 칭했다.
7개의 키워드로 떠나는 뮤지엄 여행
책은 전체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의 제목으로 일곱 개의 영문 키워드를 붙였다. 이 일곱 개의 영문 키워드는 우리말 제목과 짝을 이루지만,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옮긴 것이 아니라 저자의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뮤지엄을 경험하는 일곱 개의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키워드에 달린 우리말 제목에는 서로 모순되는 단어를 조합했는데, 과거를 담고 있지만 미래 지향적이고, 공적이면서 사적이기도 하며, 경계가 있지만 무한한 확장 가능성이 있는 등 뮤지엄이 가진 역설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1. exception―오래된 미래」에서는 혁신, 파격이라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던 뮤지엄을 다루고 있으며(콜룸바뮤지엄, 솔로몬R.구겐하임뮤지엄), 미래 지향적인 지성의 공간으로서, 새로운 혁신의 장으로서의 뮤지엄을 이야기한다(파리국립자연사박물관, 케브랑리뮤지엄).
「2. identity―정지된 흐름」은 뮤지엄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들을 묶었다. 이들 뮤지엄의 테마와 미션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어떻게 잘 살리고 있는지를 들여다본다(유럽지중해문명박물관, 모건라이브러리&뮤지엄, 무빙이미지뮤지엄 등).
「3. imagination―다가올 추억」은 뮤지엄의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다. 뛰어난 상상력을 기반으로 마련된 전시 콘텐츠와 연출 기법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뮤지엄들을 선별해 실었다(데시마아트뮤지엄, 루이비통파운데이션, 태양의배뮤지엄 등).
「4. basic―준비된 우연」은 뮤지엄의 기본과 본질 그리고 태도에 대한 관점으로 풀어본 이야기다(한국가구박물관, 로마유적보호관, 진시황병마용박물관 등).
「5. convergence―낯선 공감」은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으로 공감되었던 끌림의 장소, 예측하지 못한 반전의 경험을 주었던 뮤지엄에 대해 이야기한다(라이트하우스뮤지엄, 로댕뮤지엄, 에릭사티뮤지엄 등).
「6. expansion―무한한 경계」에서는 뮤지엄의 기능과 역할의 확장, 즉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해 이야기한다(시카고과학산업박물관, 로즈센터, BMW뮤지엄 등).
「7. regeneration―새로운 기억」에서는 장소로서의 뮤지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고 뮤지엄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뮤지엄의 존재 이유를 우리의 삶과 연결하여 살펴본다(베를린유대인박물관, 9/11메모리얼&뮤지엄, 사북탄광문화관광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