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진실은 끝끝내 맞선 양편의 싸움이다
철학과 과학, 예술적 쟁점의 향연에 참여해
새로운 언어로 옮긴 헤겔의 『정신현상학』
책 속에서
죽음을 꺼리고 황폐화를 피해 자신을 순수하게 보존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견뎌내고 죽음 안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삶이 정신의 삶이다. 절대적 파열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정신은 비로소 자신의 진실을 얻는다. (…) 정신은 부정적인 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놈의 곁에 오래 머무름으로써만 이런 위력이다.(45쪽)
“노력하는 한에서, 인간은 헤매기 마련이다”라는 괴테의 말마따나, 사람은 부정하는 자, 안주하지 못하는 자, 끝없이 헤매는 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안쓰럽기 그지없죠. 니체의 초인과 스피노자의 현자가 평범한 인간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한편으로 납득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그 인간적인 헤맴이 곧 진실의 움직임이라고 가르치는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헤겔입니다. 헤겔의 진실은 한없이 멀고 고요한 수평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거세게 출렁거리는 파도입니다.(201쪽)
철학자 전대호의 치열한 고민으로 다시 태어난
헤겔 『정신현상학』의 새로운 번역과 강독
1807년 출간된 『정신현상학』은 근대 철학과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인 헤겔 사상의 주요한 출발점이 된 책으로,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인간 주체성의 자각을 정점으로까지 끌어올려 근대철학을 완성시키고 현대철학의 시작점을 알렸다. 청년 헤겔은 최초의 체계적 저작인 이 책을 통해 자기 철학의 인식론적 토대를 세웠고 이 토대 위에서 그의 철학을 완성해나갔다. 헤겔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라면 필수적으로 읽고 넘어가야 하지만, 헤겔의 저작 중에서도 난해하기로 손에 꼽히는 책이기도 하다.
‘정신현상학 강독’ 시리즈의 제1권으로 나온 『정신현상학 강독 1』은 헤겔주의자를 자처하는 철학자이자 번역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저자가 『정신현상학』(‘의식’ 부분)을 옮기고 강독해 함께 엮은 책이다. 번역과 강독을 한 권의 책에 묶은 것은 보기 드문 시도다. 한 문장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그의 꼼꼼한 번역과 강독은 입문자를 포함해 헤겔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을 헤겔 철학의 의미와 심오함 속으로 안내한다.
국내에서는 고故 임석진 교수의 번역본이 2010년대 중반까지도 『정신현상학』의 유일한 번역본이었으며 정본으로 받아들여졌다. 저자는 『정신현상학』 번역 시 임석진 본을 전혀 참고하지 않고 정확성과 가독성을 모두 살리는 새로운 번역을 시도했다. 저자는 이전 번역본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번역은 연주다. 세상에 단 하나의 연주만 있는 상황은 청중과 원곡의 작곡가뿐 아니라 그 유일한 번역자 자신에게도 마뜩할 리 없다”며 헤겔이라는 철학자의 입체적 진실을 알기 위해 다양한 번역이 존재해야 함을 강조한다.
총 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이번 1권은 「서문」 「들어가는 말」을 포함해 ‘의식’에 대해 다루는 1~3장을 번역하고 강독했다. 이 강독 시리즈는 총 5권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2권은 『정신현상학』의 4장 ‘자기의식’, 3권은 5장 ‘이성’, 4권은 6장 ‘정신’, 5권은 7장 ‘종교’를 이어서 다룬다.
‘반대편의 말도 들어라!’
끝내 인간을 마주하는 근대정신의 소유자 헤겔
새로움을 찾아 초고속으로 달리지만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 진실은 온전히 홀로일 때 고요함 속에서만 마주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 사회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다시 헤겔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찬 도시의 모습에 최소한 진실의 한 자락이 들어 있으며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본다. 헤겔은 개인이 범접할 수 있는 위대한 절대정신을 준엄하게 선포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상 헤겔의 본질은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반대편의 말을 듣고 그것에 맞서는 과정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이라는 믿음이다. 헤겔은 ‘진실’ 혹은 ‘전체’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진실은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감으로써 도달할 수 있고, 개념과 언어, 정신을 통해 사유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이 책은 헤겔주의자의 강령을 세우며 수평적인 대화판을 만들어 모두가 대화판에 참여하기를 유도한다. 그 과정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목적과 의미는 허구로 격하되고 인간의 틀을 벗어난 곳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대세인 요즘, 헤겔의 철학을 되짚어보며 인간적인 것을 되찾고 주체로 나서기를 독려하는 가운데 독자에게 무기력에서 벗어나 삶을 바꾸는 능동적 자세를 촉구한다.
말하는 사람은 고립된 개인으로 머물지 않고 모두가 참여하는 대화판으로 나서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호칭은 ‘철학자’일 것입니다. ‘철학자’도 ‘헤겔주의자’도, 뭐 대단할 것 하나 없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해야 마땅한 호칭입니다.(206쪽)
“모든 단박인 놈은 실은 매개되어 있다”
기반에 의지하는 삶에서 빠져나오기
『정신현상학』은 “실체적인 삶”의 ‘단박’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에 대해 논한다(‘무매개적’이라고 번역되던 ‘unmittelbar’의 번역 용어로 이 책은 ‘단박’을 택한다). 여기서 실체적인 삶이란 사연도 없고 증명도 없이 ‘단박’에 존재하는 관습, 종교적 신념, 자연에 의지하는 삶을 가리킨다. 그러나 헤겔에 따르면 아무리 단박인 것이라고 해도 실은 그 나름의 사연과 정당화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그 사연들을 꼼꼼히 따져보고 그것이 품고 있는 모순을 직면하는 것이 헤겔주의자의 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2부의 강독 부분에서 자연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셸링의 철학과 존재의 일의성을 주장하는 들뢰즈의 철학을 헤겔과의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 이 책은 셸링과 들뢰즈의 철학이 헤겔의 ‘매개’ 관념과 치열한 싸움 끝에 다다르는 진리의 성취를 간과하고 있음을 경계한다. 셸링은 평범한 주체-대상 관계를 뛰어넘어 신비로운 진실을 발견하려 애쓰는 철학자다. 헤겔이 부정성과 모순에 주목하는 것에 반해 셸링은 주체와 대상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리를 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울타리 안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헤겔에게 있어 이러한 셸링의 철학은 허무맹랑하다. 또한 들뢰즈가 내세우는 존재의 일의성은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내려온 철학의 기본 전제 ‘존재는 여러 방식으로 이야기된다’를 내치고 ‘존재는 오직 하나의 의미로만 이야기된다’라는 파격적인 전제를 내세운다.
들뢰즈가 인기를 끄는 원인으로 일본 지식인들로부터 이어져온 비서구 지식인들의 좌절과 고뇌가 한몫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추측한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절망한 지식인에게 대화판에서 물러나 ‘존재’ 자체의 말을 듣는 들뢰즈의 철학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철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를 헛수고로 취급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 존재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고 대화를 통해 각자의 의미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그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다. 인간을 마주하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다고 이 책은 강조한다.
제가 헤겔에게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 하나는 ‘사람은 사람을 상대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 동등한 관계에서 수평으로 오가는 대화는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드문지요. 그 어떤 숭고한 깨달음보다, 그 어떤 첨단 사상보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나와 동등하게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 태도가 바로 헤겔 철학이 말하는 바입니다.(203쪽)
번역하는 철학자,
번역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
이 책의 독특한 구성에 뒤따르는 장점은 2부 강독에서 1부에서 번역해놓은 헤겔의 저서를 풀이함과 동시에 기존 번역 용어와 다른 용어를 선택한 이유를 밝혀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석진 번역본이 정본으로 받아들여져 국내의 헤겔 철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저자는 새로운 번역 용어를 택한 이유를 명쾌히 따져 밝히고자 했다.
대표적으로 ‘unmittelbar’의 번역어로 사용되던 ‘무매개적’을 대신해 ‘단박’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무매개적’이라는 단어는 ‘매개’라는 개념의 반대에 있는 용어로 ‘매개’라는 단어를 알고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 매개된 것이란 사연이나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을 말한다. ‘무매개적’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연도 증명도 없는 것을 일컫는데, 이 책은 이를 단순히 ‘매개’의 반대 개념으로만 두지 않고 그 자체로 이해가 용이한 개념이 되도록 ‘단박’이라는 용어를 택했다.
또한 ‘지양’이라고 번역되었던 ‘aufheben’의 번역어로 ‘거둠’이라는 한국어 단어를 채택했다. 헤겔에 따르면 ‘aufheben’은 “부정하기인 동시에 보존하기”다. 우리가 벼를 거둘 때, 그 거두기는 생명체로서의 벼에게는 영락없는 부정하기다. ‘지양’이라는 한자어보다 이미 한국어에 존재하던 ‘거둠’이라는 단어가 헤겔 철학이 함축하는 바를 더 잘 나타내고 가독성을 높인다.
‘즉자대자’라고 옮겨지던 ‘an und fur sich’는 ‘다움’으로 번역한다. 일반적 용례에서 ‘답다’는 존재의 차원에서 결정되어 있는 특성, 조건, 능력 따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행동을 두고 내리는 평가이다. 헤겔의 ‘an und fur sich’가 ‘그 자체이며 자기를 마주한 상태’를 나타냄을 생각해보면, 이 단어는 한국어 ‘다움’으로 번역했을 때 그 실천성을 자명하게 드러낸다.
5장 「바깥세상과 대화함」에는 뇌과학이나 들뢰즈 등 다양한 주제를 비판적으로 다룸과 동시에 2018년 화제가 되었던 한국칸트학회의 칸트 전집 번역 출간과 더불어 일어난 번역 논란에 관한 글도 수록되어 있다. 한국칸트학회는 칸트 전집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칸트 철학의 핵심 용어인 ‘transzendental’과 ‘a priori’를 각각 ‘선험적’, ‘아 프리오리’로 번역하겠다고 공표했다. 이 단어들이 한국어 맥락에 맞는 번역어가 아니라는 면에서 논란을 빚으며 철학자들 간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 책은 이 논란에 부쳐 ‘맞춤형 번역’, 혹은 ‘고립형 번역’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맞춤형 번역은 원어와 번역어가 일대일 대응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번역은 원어가 담고 있던 개념의 풍부함을 훼손시키고 죽은 개념을 생산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맞춤형 번역이 서구의 학문을 수입해오던 역사 단계에서는 충분히 바람직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 역시 새로운 번역을 통해 우리의 고유한 철학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는 시기가 도래했다고 주장한다. 원어의 의미를 더 깊이 탐색하고 그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우리말을 찾아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맞춤형 번역은 그런 “뒷면이 없는 개념”, 바꿔 말해 ‘앞면만 있는 개념’을 생산합니다. 오염되고 왜곡되는 것, 오류를 범하는 것은 살아 있는 놈의 본질적인 능력인데, 맞춤형 번역은 그 능력이 거세된, 그러니까 죽은 개념을 생산하는 것이지요. 원어에 담긴 뜻을 명확한 울타리 안에 고립시키면 혼동의 여지가 없어져 좋을 것 같지만, 그건 그 뜻을 가둬서 말려죽이는 짓입니다! (…) 언어란 각자의 것이며 또한 모두의 것인데, 헤겔식으로 말하면 구체적 보편인데, 그렇게 될 리가 없어요.(450쪽)
저자는 번역이 단순히 원전을 한국어로 옮기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내재된 가치관, 편견들을 품고 있음을 인정하며 이를 경계하는 번역가로서의 굳건한 철학을 내세운다. 이러한 철학으로 무장한 저자의 번역과 강독을 따라 헤겔을 읽는 독자는 원어와 번역문 사이의 간극을 가늠해볼 수 있다. 번역 과정에서의 고민과 선택의 이유를 가감없이 드러내보이는 이 책은 입문자를 포함해 헤겔을 공부하는 모든 이에게 정신을 깨우는 새로운 헤겔 독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