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간 엄마가
푹 고아 낸 곰국에서
뽁뽀글 다글다글 김이 폭폭폭
뚜껑 틈으로 뽀그르르 기어 나온
수증기 거인
뿌옇게 번져
창문에 뺨을 대고
흥, 골목길에 아이들이 없군
드드드득 허리를 펴고 일어섰어
후끈 달아올라 천장을 쿵쿵 들이박다가
줄줄줄 벽을 타고 흘러내려
시계추 잡고 덜렁덜렁
심심한 시간을 오도독오도독 깨물었어
볼이 빵빵해질 때까지 후룩후룩
혼자 노는 시간을 들이마셨어
한 그릇 뚝딱 꺽 트림 나온 후에야
머리카락 풀어 헤치며
다시 스며들었지
찜통 찌그러진 것 좀 봐
11시 59분에 시계가 멈춰 있고
방문이 삐걱거리잖아
우당탕 쿵쾅 우당탕탕
뼈다귀 거인도 나왔다 들어가서 그래
_「엄마 없는 날」 전문
| 심심한 시간을 꼭꼭 씹어 삼키며 자라나는 아이들
| 진현정 시인이 차려 낸 든든한 마음 한 상
아이들은 힘차게 뛰놀 때 자란다. 그러나 뛰놀지 않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자란다. 처음으로 이가 빠져 입 안의 허전한 빈자리를 느낄 때, 엄마가 출장 간 날 처음으로 혼자 밥을 차려 먹을 때, 학교에서 돌아와 빈집에 들어설 때. 『심심한 시간을 꿀꺽』에 담긴 시간들은 얼핏 고요할 것 같지만 아이가 낯선 감정을 마주하고 소화하는 소리로 분주하다. 아이가 “심심한 시간을 오도독오도독 깨물”고 “볼이 빵빵해질 때까지 후룩후룩/ 혼자 노는 시간을 들이마”셔 그 시간을 소화하고 나면, 마음의 키는 한 뼘 더 자라난다. 운동장에서 혼자 축구공을 차다가 꽈당 넘어지는 순간도, 어느 깜깜한 밤 ‘선처럼’ 누워 있을 때의 시간도, 꼭꼭 씹어 한번 겪어 내고 나면 그 경험이 ‘밥심’만큼 든든한 ‘마음의 힘’이 되어 준다.
음식의 심상이 자주 등장하는 『심심한 시간을 꿀꺽』에 대하여, 해설을 쓴 유강희 시인은 ‘밥심’과 ‘약심’에서 비롯되는 ‘동심’의 세계라 표현하였다. 먹는 행위는 곧 모든 생명의 근원적 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힘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힘’이야말로 이 동시집이 우리에게 건네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은 기운 없는 애벌레에게 바람에 흩뿌려진 노란 소나무꽃가루를 “밤새/ 봄비로/ 걸쭉하게 녹여/ 조금조금” 삼키도록 건네고(「꽃가루약」), 시리아에는 포탄 대신 구름도 뚫을 만큼 거대한 콩나무가 자라나는 걸 소망한다(「전쟁과 콩나무」). 이 세계를 이루는 크고 작은 존재들이 필요로 하는 힘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다정함이 『심심한 시간을 꿀꺽』이라는 이름의 동시 한 상에 소담히 차려진다.
| 10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써 온 시인의 첫 동시집
| 집요하게 파고든 일상의 순간들이 한 권의 동시집으로 영글다
『심심한 시간을 꿀꺽』은 진현정 시인의 첫 동시집이다. 네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진현정 시인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어떤 책을 읽어 줄까 고민하다가 어린이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동시와 그림책을 읽고 그림책 강사로도 활동하면서 호기심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재미에 푹 빠졌고, 그렇게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 2009년에 걸쳐 아동문학 전문 월간지 『어린이와 문학』에 「포도씨의 꿀꺽 인생」(발표 당시 제목 「포도」) 「바지락」 등 네 편의 동시가 4회 추천 완료되었다. 웬만한 신춘문예보다 어렵다는 『어린이와 문학』 신인작가로 등단한 이후에도 동시 모임 ‘또박또박’과 ‘동시랑’에서 활동하며 매일같이 동시를 써 왔다.
저는 제 삶을 비추는 거울로 동시를 쓰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지내는 모든 순간이 저에게 발견이고 놀라움이고 가르침을 줍니다. _진현정
그에게 동시는 삶의 구체성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된다. 특별한 가상의 세계를 따로 만들지 않고 일상의 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또-옥, 쪼-옥, 톡 포도를 따 먹으며 쌓인 포도씨가 무너지는 순간(「포도씨의 꿀꺽 인생」), 날이 싸늘해져 빨래 건조대가 안방으로 파고드는 순간(「파고든다」)들이 모여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권의 동시집이 된다.
겨울이 오면
뱀, 개구리
잠자러
땅속으로 파고들고
아파트 베란다
꽃과 선인장
거실로 파고든다
김장 김치 차곡차곡
냉장고 속으로 파고들고
호박고구마 상자에 담겨
구석으로 파고든다
곧
안방으로
빨래 건조대가 파고든다
_「파고든다」 전문
| 곰탕 한 그릇처럼 다정한 마음을 담아
|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를 둔 동시
진현정 시인은 시적 대상을 자신 앞으로 바투 끌어당긴다. 때문에 그의 시는 좀처럼 들떠 있거나 과장의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미덥고 세밀한 시선이 묵직한 호흡에 의해 가만히 감싸여 있다. 기발함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시적 집중과 단단함을 견지하며, 현실과의 긴장 관계를 팽팽히 유지한다. _유강희(시인)
담담하게 일상을 파고드는 진현정 시인은 ‘밥심’으로 살아가고 ‘밥심’으로 버티는, 우리 주위 수많은 사람들의 평범하고도 고단한 삶 또한 동시 속으로 끌어왔다. 아이가 집에 혼자 있는 동안 아이의 엄마와 아빠와 누나 또한 버거운 시간을 겪어 내고 있었음이 드러날 때, 어린이 독자의 세계는 조금 더 넓어진다. 밤새 편의점에서 일한 누나에게는 ‘단잠’이(「누나를 싣고」), 대리운전을 하다 아침에 퇴근하는 아빠에겐 ‘지하철이 내미는 동그란 손잡이’가(「덥석 잡고」)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시인이 찾아 건네는 힘은 환상 속 세계가 아니라 지금 이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다정한 마음이 우러난 곰탕 한 그릇 뚝딱한 것처럼 든든해진다.
땡그랑
25시 종이 울리면
누나의 낡은 운동화는
유리 구두로 변하고
편의점 앞에
황금 호박 마차가 도착합니다
삼각김밥 바코드를
마저 찍고
거스름돈까지
꼼꼼히 세어 둔
신데렐라는
마차를 타고
옥탑방으로 가
푹 단잠을 잡니다
호로록
수챗구멍으로
쥐들이 빠져나갑니다
_「누나를 싣고」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