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눈빛 때문이다”
끌리는 그림에는 분명 눈빛이 있다
그리고 거기,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그림을 통해 마주하는 타인의 삶,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
그림에 시선이 가닿았을 때 이야기가 시작된다
눈빛은 마음을 담는다. 눈빛만 보아도 통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낯선 이와 눈이 마주치고 마음을 들킨 듯 숨고 싶을 때도 있다. 눈빛은 감정을 담는다. 눈빛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즐거운지 구슬픈지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눈빛은 한 사람이 지나온 생을 담는다. 그가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눈빛을 통해 읽을 수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이야기는 눈빛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눈빛으로 그림을 본다. 그림은 화가의 경험과 감정이 담긴 결과물이지만, 감상자는 화가가 만들어낸 그림 속 세계를 자신의 이야기로서 체험한다. 그림에 시선이 가닿을 때 그림과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림에 등장한 인물의 시선과 나의 시선 사이에서 끊임없이 질문과 대답이 오가다보면, 어느 순간 자기 안의 감정과 이야기가 소용돌이처럼 일 때가 있다.
“저는 모든 그림에 눈빛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정물화나 풍경화에서도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이미지 하나 없이 점, 선, 면, 색채만 있는 추상화에서도 형형한 그림의 눈빛을 읽습니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로랑생의 여인들에게서는 어땠겠어요. 자신감 있는 몸짓에, 부드러운 얼굴에, 바둑알 같은 눈빛에 시선이 가고 그저 바라보다가 이내 그림과 오래오래 마주해 시간을 보냈습니다.”_「책을 내며」에서
그림과 눈을 마주치고 관계 맺기
『그림의 눈빛』은 지은이가 직장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 여성으로서 경험한 일상에 그림을 짝지어 펼치는 그림 에세이다. 전작 『그림은 마음에 남아』로 빠듯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그림에서 얻은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시선’이라는 키워드에 방점을 찍고, 그림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보며 그림과 관계 맺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상황을 파악하거나 정물화나 풍경화에 얽힌 이야기를 짐작해보고, 그림 속 대상이 느끼고 있을 기분을 가늠해보며, 그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담을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자신도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때가 있었는지 질문을 던지며 그림을 통해 자신의 현재를 진단한다.
“커피 마시는 여농은 아무런 감정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카미유 피사로의 시선과 붓질은 그녀를 향한 애틋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매일 아침마다 자연스럽게 들이키는 커피는 곧 노동의 시작을 알린다. 이처럼 당연한 노동과 당연한 하루에 피사로는 안타까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노동에 뛰어들기에는 너무 어린 그녀에게 느낀 애틋함, 매일의 노동에 대한 존경과 위로 같은 감정이 그림에 스며 있다.”_「내 혈관에는 커피가 흐른다」에서
지은이의 그림 읽기는 그림을 천천히 바라보고 그림과 대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림이 감상자의 삶 속으로 들어와, 감상자의 삶을 기억하고 재현해준다는 사실을 자신의 이야기로 증명해나간다.
지은이는 루마니아의 화가 슈테판 루키안의 「머리 감기기」를 보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머리 감기기」는 누군가가 아이의 머리를 감겨주는 모습을 포착하고 있는 그림으로 따뜻한 온기가 가득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지은이를 어린 시절 눈이 펑펑 내리던 강원도의 외할머니 댁으로 데려가, 따뜻한 방 안에서 자신의 머리를 감겨주던 할머니의 손길을 느끼게 한다. 지은이는 이 그림에서 “사랑의 시선은 사랑의 대상 위에 붓질처럼 쌓인다”라는 메시지를 읽어내고 빛바랜 기억에 선명한 색감을 덧입힌다. 한편 엘 그레코의 「가슴에 손을 얹은 귀족 기사」를 보면서는 자신의 내면을 살핀다. 단정한 차림새에 길고 가는 손가락을 가슴 위에 얹은 한 남자의 초상화를 통해 이 남자가 누구이고,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가 어떤 심경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등을 묻는다. 그리고 이 물음은 곧 자신에게로 향하며 자신이 지키고 있는 것과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본다.
언제나 ‘그림 같은 순간’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다. 1부 「일상의 민낯」은 일상에서 발견한 ‘그림 같은 순간’을 이야기한다. 평범하고 소중한 하루하루가 예술작품과 만나 풍성한 이야기가 된다. 말레비치의 「갈퀴를 든 여인」에서 고된 업무 어깨 통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알베르트 앙커의 「닭에게 모이를 주는 소녀」를 통해 월급날 집에 사 들고 갔던 치킨에 얽힌 추억을 떠올린다.
2부 「그녀의 얼굴」에서는 여성 화가의 작품과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에피소드를 토대로 이야기를 펼친다. 가령 엄청난 고통을 승화하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그려낸 프리다 칼로를 통해 사랑의 다양한 모양을 생각해보고, 유딧 레이스터르의 인물화와 레오노르 피니의 자화상을 통해 삶의 태도와 욕망의 관계성을 고민한다.
3부 「마음의 거울」에서는 그림 앞에서 자기 안의 고민과 감정을 마주하며 토로한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를 통해 자신의 속물성을 직시하고,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 앞에서 고된 삶을 거쳐온 누군가의 신발 끈을 묶어주며 존경과 애정을 전하고자 한다. 또한 라우리츠 링의 「6월에」를 통해 졸업 후 각자의 길을 찾아 결실을 맺는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생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지은이는 화가가 캔버스에 담은 세상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읽는다. 거기 담긴 수많은 사람과 풍경 앞에서 잠시 주춤하고, 시선을 마주하며 그림 안에 머문다. 화가가 그려낸 이야기에서 지은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했듯이 책은 또다른 이에게 그림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려보라고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