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좇는 청춘, 대도시의 배신과 좌절
「천진팡은 없다」는 ‘인간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목표를 향한 한 기구한 여인의 도전적인 삶을 3인칭 화자인 친구가 관찰하면서 서로 얽혀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대가족이 지방에서 올라와 베이징의 쪽방에서 미어터지듯 살아가는 한 집안의 막내 여자아이에겐 세상에 진출할 수 있는 어떤 지원이나 격려도 기대할 수 없다. 천진팡이 그랬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것조차 폭력으로 짓밟는 가족으로부터 겨우 독립한 천진팡은 동네 유명 건달의 여자친구가 되어 옷장사로 돈을 벌지만,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10여 년의 시간이 지난 유명 음악가의 방중 공연 콘서트홀이었다. 주변의 눈총을 받을 정도로 환호를 지르는 젊은 여자를 뒤돌아보던 주인공은 그녀가 과거 창밖에 서서 자기가 연주하던 바이올린 곡을 조용히 들어주던 같은 반 친구 천진팡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미 사업가로 변신해 기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천진팡에게서 과거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천진팡이 추진중인 예술품 투자 관련 거액 프로젝트를 매개로 여러 사람과 얽혀드는데, 옛 친구를 돕게 되는 주인공은 서서히 그녀의 실체적 삶에 다가가게 된다. 좌절한 바이올리니스트인 화자는 예술에 대한 글을 써서 먹고 살지만, 모든 것을 냉소적·부정적으로 보는 회의주의자다. 반면, 천진팡은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여전히 살아남고자 애쓰는 위태로운 도전자다. 삶에 대한 그 온도차가 둘을 격리시키고 또 만나게 한다. 그녀는 고도성장기 중국 대도시의 한탕주의를 삶을 단번에 바꿀 기회로 보고 올인한다. 누구나 애벌레가 고치를 깨고 나와 나비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나비를 보면서 징그러운 벌레를 떠올리며 혐오스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을 되뇌면서. 하지만 베이징이란 도시에 천진팡의 자리는 없었다. 수많은 영웅이 몰락하고 수많은 여자가 비참해지는 이 도시의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들의 청춘도 끝났다. 그러나 사람들이 발산하는 에너지가 끊임없이 이 도시를 맴돌 것이다. 무한 반복되는 오케스트라 합주처럼, 천진팡의 목소리와 표정처럼.
명징하고도 긴 여운, 「세 남자」와 「합주」
이어지는 「세 남자」와 「합주」는 둘 다 짧은 편이며 에피소드 하나에 집중해서 명징한 주제를 포착해내는 긴 여운의 미학을 보여준다. 시골에서 올라와 동네 구멍가게에서 카운터를 보는 소녀 ‘팡화’의 시점에서 세상을 그린 「세 남자」는 원양어선 선원, 음악가, 조직폭력배라는 서로 상이한 직업의 세 남자를 관찰하는 이야기다. 이들은 전혀 무관한 사람들 같지만 서로 은원으로 얽혀 있었는데 소녀는 그들 각각과의 로맨스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게 하루의 일과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드라마와도 같은 일이 그녀 앞에 펼쳐진다. 「합주」는 바이올린 개인교습을 받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이야기다. 과외선생의 오피스텔에서 수업을 듣는 소년은 앞 타임이고, 소녀는 바로 그 뒤 타임이다. 어느 날 창턱에 놓인 홍시 하나가 둘 사이를 연결해주는데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메시지만 주고받던 소년과 소녀는 점점 가까워지고 참지 못한 소녀는 계단참에서 소녀를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마스크를 쓴 소녀는 그와 마주치기를 극도로 거부하고 결국 소년은 문밖에서 방안의 피아노 소리에 맞춰 바이올린 협주를 시도한다. 하지만 「합주」의 결말은 독자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충격을 안겨준다.
일상 속의 기괴한 상상력과 서스펜스
「눈 깜빡이지 않기」는 네 명의 동년배가 카페에 모여 아주 긴 시간 수다를 떠는 잡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백인과 결혼해서 중국을 떠난 여자 동기가 이혼녀가 되어 돌아오고, 그녀의 ‘어장 관리’ 멤버였던 남자 셋이 호출을 받아 환영회 겸 만난 자리에서 이들은 엉뚱한 내기를 한다. 눈을 가장 오래 깜빡이지 않는 사람이 돌아온 그녀와 첫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는 것. 오래된 욕망은 서서히 달아올라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데 게임에 열중한 이들은 전혀 엉뚱한 사건을 마주하게 되는데……. 「5년 사이」 상·하편은 도시 변두리의 별볼일 없는 청춘들이 지리멸렬한 성장기를 보내면서 어떻게 그들 사이의 교감과 나름의 의리, 삶의 의미를 간신히 포착해 그 줄을 따라서 성장해가는지를 한편의 성장영화처럼 보여준다. 벌레를 먹는 소년, 옆으로 걷는 아이, 줄담배를 피는 소녀는 주인공 화자와 팀을 이뤄 아버지를 구두로 때리는 깡패의 폭거에 맞서게 되는 에피소드와 그 일이 있고 난 5년 뒤의 후일담을 다루고 있다. 「거북이도 쥐를 문다」는 성적 알레고리를 통한 타락한 윤리에 대한 절묘한 풍자를 시도한 소설로 굉장히 잘 짜인 조 속에서 스피드한 전개를 통해 작가로서의 스이펑의 매력을 잘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