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모차르트, 베토벤도 가보지 못한 음악의 신대륙,
이제는 현대음악이다!
“왜 모든 클래식 음악 입문서와 음반 가이드는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에서 끝나는 걸까? 그 뒤로는 정녕 새로운 걸작이 없는 걸까?” 이 책은 이런 의문에서 출발했다. “서양 고전음악이라는 클래식 음악의 사전적 의미 때문에 현대음악은 종종 비인기 장르 중에서도 비인기 장르로 취급받는다. 좋게 말해서 ‘별미’지만, 나쁘게 말하면 ‘섭취 불가 판정’이 떨어지기 일쑤다”라는 지은이의 말처럼 많은 경우 현대음악은 그저 어렵고 불편한 음악 장르로 여겨지며 일상과 꽤나 먼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모든 예술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켜왔다. 클래식 음악이라고 다르지 않다. 과거 모차르트와 베토벤, 바흐와 쇼팽이 클래식 음악을 대표해왔다면, 이제는 동시대 작곡가들이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로서 새로운 음악을 속속 세상에 내놓고 있다. ‘고전’의 아름다움을 계승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으나, 맞서고 부수고, 새롭게 다지는 일 또한 ‘현대’ 예술의 진보적 성취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는 그들의 노력에 한번쯤 관심을 기울일 차례다.
하지만 현대음악에 왠지 거리감을 느끼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불쑥 우리 시대의 음악을 들어보라고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클래식 음악 전문기자로 활동해온 지은이이지만 현대음악이 부담스러운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토로한 바 있으니 한걸음씩 차근차근 다가갈 필요가 있다. 『오늘의 클래식』은 새로운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거나, 현대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모를 때 좌표가 되어줄 ‘현대음악 안내서’이다. 이 책은 2010년 처음 세상에 나왔다 10년 만에 개정 작업을 통해 ‘업데이트와 업그레이드’를 마쳤다. 자, 이제 한층 업그레이드된 안내서를 따라 현대음악과 거리 좁히기를 해보자.
미지의 음악 대륙으로 떠나는 현대음악 여행
현대음악이라는 신대륙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지은이가 택한 방식은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음악과 그들의 삶을 엮어 소개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일생이 현대음악을 매개 삼아 모였다 흩어지며 각 작곡가들의 예술적 특성과 의미를 조목조목 짚어준다. 스트라빈스키부터 한국의 진은숙까지, 총 40명의 작곡가들의 성장과 작품세계를 한 권에 펼쳐보이는 지은이는 이런 구성에 대해 “말러와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즈음에서 멈춰 있는 서양 고전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이 스트라빈스키에서 출발한다면, 지금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종점은 진은숙이 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현대음악 작곡가의 궤적을 뒤쫓는 작업 자체가 지금 여기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은 총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작은 스트라빈스키가 포함된 러시아이며, 마지막은 진은숙이 포함된 아시아이다. 지은이는 현대음악사를 살펴보면 20세기 음악의 역사가 20세기 정치사, 문화사와 결을 같이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구대륙 유럽이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힘을 잃고, 신대륙 미국이 동력을 얻는 모습이나,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이 힘을 잃고 아시아와 남미 등 다양한 지역이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하는 등, 현대음악사와 현대사를 나란히 펼쳐놓고 보면 지은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장 러시아
1905년 피의 일요일부터 1917년 10월 혁명까지, 20세기를 통째로 흔들어버린 사건이 러시아에서 일어났고, 음악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지은이는 이러한 격랑의 시대 속에서 각자의 음악을 발전시킨 세 명의 작곡가를 깊이 있게 다룬다. 먼저, 러시아를 떠나 미국에 정착한 스트라빈스키는 ‘리듬 혁명’을 일으켜 음악의 향방을 영원히 돌려놓았고, 소련에 남아 ‘체제를 지킨 작곡가’로 불리는 쇼스타코비치는 고전 양식의 근간을 지키면서도 그 안에서 가능성을 극한까지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혁명 직후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1936년 돌연 조국으로 돌아간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적으로는 고전적 형식을 지키려 애썼지만 낭만주의적 이상은 철저히 지워나간 작곡가로 기록된다.
2장 오스트리아
어쩌면 현대음악의 가장 급진적인 변화는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쇤베르크는 그의 제자들인 베르크, 베베른과 함께 현대음악의 삼위일체라 불리며 마지막 남아 있던 고전음악의 구조인 조성마저 허물어버리는 실험을 감행했다. 쇤베르크는 “모든 작곡가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면서 반음계와 불협화음을 사용하는 단계를 지나 아예 조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무조’를 택했고,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12개의 음에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12음 기법’을 창안했다. 제자인 베르크와 베베른은 스승이 개척한 길을 따르면서도 각자의 독자적인 음악성을 획득해 나갔다. 베르크는 12음 기법을 충실히 따르는 가운데 풍부한 화성을 결합해 서정성을 살려냈고, 베베른은 마치 법규처럼 스승의 ‘규칙’을 지키면서 완전무결함과 냉철함을 추구했다.
3장, 9장, 11장 미국
세계사를 통틀어 미국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풍부한 자원, 불도저 같은 개척정신으로 분야를 막론하고 세계를 장악해나갔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신세계 교향곡」을 작곡한 드보르자크부터 뉴욕으로 향했던 말러까지, 20세기 초반까지 음악에서도 수입국 신세를 면치 못했던 미국은 이후 코플런드, 거슈윈, 아이브스와 같은 작곡가를 배출하며 ‘미국 음악’의 초석을 다졌고, 20세기 후반에는 현대음악의 무게중심을 미국, 특히 뉴욕으로 옮겨왔다. 이런 경향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더욱 뚜렷해졌다. 전후 자본주의 소비문명과 대중문화의 역동성 속에서 아방가르드를 자처한 존 케이지는 유럽 음악계를 뒤흔들어놓았고, 필립 글래스와 스티브 라이시는 미니멀리즘을 주창했다. 그리고 이제 미국의 현대음악은 재즈와 뮤지컬 같은 미국 음악의 자산을 포용한 번스타인, 유럽적 모더니즘의 대의에 충실한 카터, 선배들과 차별화를 꾀한 미니멀리즘을 선보인 애덤스에 이르기까지 그 외양과 폭을 넓혀가고 있다.
4장 망명객
나치의 광풍이 휘몰아친 시기에 신발을 갈아신 듯 국경을 넘나들어야만 했던 세 명의 작곡가 힌데미트, 바일, 아이슬러. 이들은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이념, 인종 문제 때문에 고국을 떠나 망명객이 될 수밖에 없었던 작곡가들이다. 망명 사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의 정착지는 결국 신대륙 미국이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을 겪었던 이 작곡가들은 각각 아마추어 연주자들을 위한 실용음악을 주장하거나(힌데미트) 전통적 오페라를 비판하고 새로운 음악극 양식을 개척하거나(바일), 음악으로 혁명을 꿈꾸는(아이슬러) 등 음악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진보적 입장을 띠었다.
5장 프랑스
러시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현대음악이 파격적이었다면, 프랑스에서는 미묘하고 은근한 방식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드뷔시와 메시앙, 불레즈까지 프랑스 작곡가들은 아시아 음악에 관심을 나타내면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유럽 음악의 지평을 넓혔다. 드뷔시는 인도네시아 음악에 영향받아 장·단조에 바탕을 둔 조성에서 빠져나왔고, 20세기 중반 현대음악의 산실 파리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음악세계를 펼친 메시앙은 종교적 색채를 띠면서도 음높이와 강세, 길이와 음색이 서로 연관을 맺는 고차원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의 총렬주의로 나아갔다. 메시앙의 제자 불레즈는 급진적인 방식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주장하면서 엄격한 총렬주의에 우연성을 더해 지나치게 이성적인 음악에 숨통을 틔운 한편으로, 끝없는 음악적 발전을 꿈꿨다.
6장 영국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비틀스와 롤링스톤스 같은 걸출한 세계적 스타를 낳은 영국이지만 클래식 음악에서만큼은 17세기 헨리 퍼셀 이래 대대로 수입국의 처지를 면치 못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까. 영국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상인 계층 출신인 엘가, 불가지론자였던 본윌리엄스, 동성애자인 브리튼처럼 중심보다는 주변적 가치에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국민 작곡가’라 추앙되는 엘가의 음악은 사실 혁신적이지 않다. 하지만 전통에 대한 존중과 계승은 엘가의 음악적 자산이었고, 그렇게 영국 음악은 다시 활기를 찾아 후대의 본윌리엄스나 브리튼 같은 작곡가들이 현대로 달려나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7장 독일 다름슈타트
구질서가 붕괴되어버린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세대들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슈토크하우젠, 노노 같은 급진적인 작곡가들은 미군정이 지원한 독일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의 우산 아래 모여들었다. 마땅히 따라야만 하는 규범이 사라진 시대에 젊은 작곡가들의 음악적 실험은 우연성과 전자음악, 음향에 대한 재구성과 직관음악에 이르기까지 연쇄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는 자유를 상징하는 새로운 음악이 있었고, 협소한 민족주의를 배격하는 국제주의 정신이 싹텄으며,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음악언어가 등장했다. 그리고 거기 모여든 젊은 작곡가들 중에는 한국에서 찾아온 윤이상도 있었다.
8장 동유럽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까지 유럽 음악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 나라들이 모두 강대국이었다는 점은 음악과 정치적 질서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유럽은 상대적으로 공란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공백 사이에서 헝가리의 버르토크, 체코의 야나체크는 자국의 풍부한 민족음악 유산에 주목하면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역시 헝가리 출신의 리게티는 버르토크가 다져놓은 탄탄한 토대 위에서 동시대 현대음악의 흐름을 수용하면서 한층 급진화되었다.
10장 폴란드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 폴란드는 따로 떼어놓고 다룰 가치가 있다. 독일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 사이의 십자로에 위치한 덕에 대대로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그런 지리적 입지는 한편으로는 음악적 자양분이 풍성해지는 바탕이 되었다. 폴란드는 한동안 소련의 ‘철의 장막’ 아래 들어가 있었지만, 시마노프스키와 루토스와프스키, 펜데레츠키 같은 작곡가들을 배출하며 동유럽 현대음악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12장 전후 독일
제2차세계대전 이후, 나치의 집권과 유대인 학살, 전쟁의 포화를 겪은 독일 음악계는 과거 청산과 질서 재건이라는 이중 과제에 맞닥뜨렸다. 나치 집권 기간 동안 침묵으로서 양심을 지키고자 했던 하르트만은 전후 재건의 현장에 발 벗고 뛰어들었고, 전쟁 세대의 가치를 부정하고자 했던 헨체는 1968년 학생운동을 상징하는 문제적 음악가로 떠올랐고, 보수적인 당시 서독 음악계에서 사실상 추방령을 선고받는가 하면, 격동의 현대사를 중요한 음악적 화두로 삼았다.
13장 남미
유럽에게 정복 대상일 뿐이었던 남미는 탱고와 쇼루 같은 전통음악의 가치에 눈뜨면서 거꾸로 미국과 유럽을 매혹시켰다. 피아졸라는 프랑스 파리에서 숱한 음악가를 길러낸 교육자이자 지휘자인 나디아 불랑제를 만나 자신의 진정한 갈 길이 전통적인 클래식보다는 탱고에 있음을 깨닫고 거리의 음악 탱고를 현대화해 무대 위로 불러올렸다. 브라질의 국민 음악가 빌라로부스는 대중음악 양식 ‘쇼루’를 받아들였고 브라질 전통 민요를 채집해 자신의 음악적 자신으로 삼았다. 이들을 바탕 삼아 남미는 21세기 월드뮤직의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14장 아시아
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무력에 의해 개국을 강요당했지만, 음악에서는 유럽 음악의 문법을 받아들이는 한편 교유의 문화적 자산이 녹아든 음악을 역수출했다. 이 장에서는 한·중·일을 대표하는 작곡가 한 명씩을 소개한다. 영화 「와호장룡」의 음악으로 유명한 중국의 탄둔은 동양적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현대음악을 발표하고 있으며, 전후 독학으로 음악을 익혀나갔던 일본의 다케미쓰 도루는 서양음악의 급진성과 동양음악의 전통적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음악을 내놓았다.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작곡가는 바로 한국의 진은숙이다. 그녀는 한국 현대음악에서 윤이상, 강석희, 진은숙으로 이어지는 급진적 모더니즘 계보의 마지막 자리에 위치한다. 스승 리게티의 유지를 이어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발표한 그녀는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 역임은 물론, 아르스 노바 등 한국을 넘어 세계 현대음악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동시에 거침없이 대작을 쏟아내면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대음악에 관해 글을 쓰면서 “왜 지금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작곡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는 지은이는 그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우리는 인터넷과 컴퓨터, 휴대전화와 자동차로부터 벗어난 전원생활을 동경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작곡가들의 심경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과 발맞춰 진화하는 현대음악. 지은이의 대답은 어쩌면 20세기 이후 탄생한 모든 예술을 접하는 데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접근 방식인지도 모른다.
● 추천의 말
수년 전 그가 베를린에 불쑥 나타나서 서로 알게 된 이후에, 지금까지 그와의 ‘끈질긴 악연’이 지속되고 있다. 음악계의 많은 인사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그의 철저한 직업 정신의 희생자 가운데 하나다. 신문에서 그의 글을 보면 이미 읽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다. ‘이 친구 또 사고 쳤구나!’ 이번에도 그가 제대로 사고를 쳐줄지 내심 고대하고 있다. _진은숙(前 서울시향 상임 작곡가)
7~8년 전, 내가 지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김성현 기자와 인터뷰로 첫 만남을 가졌다. 어떠한 불편한 자리에서도 먹성을 잃는 법이 없던 내가, 그날만큼은 그의 언변에 완전히 ‘털려’ 눈앞에 놓인 중화요리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다. 클래식 음악에 관해 웬만한 전공자보다 풍부한 이해력과 정보력을 가진 사람이 다시 정리해서 쓴 책이라니, 더욱더 기대되고 신뢰가 갈 수 밖에 없다. _최수열(지휘자, 부산시향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