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딘의 ‘신뢰’: 고귀한 이교도의 표상
대립과 반목이 거셌던 시기, 살라딘Saladin은 당시 무인들이 지니지 못했던 남다른 도덕적 자질로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 무슬림의 술탄이 된다. 그는 공정하고 신용이 높아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평판이 좋았는데 그 덕에 분열됐던 이슬람 세계를 다시 통합하는 위업을 이뤘다.
살라딘은 1174년 다마스쿠스 점령을 시작으로 1177년 본격적인 십자군 전쟁에 나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슬람군과 십자군의 전투를 자세하고 실감나게 묘사한다. 1177년 몽기사르 전투와 1179년 야곱의 포드 전투, 1190년에 있었던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함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를 살라딘의 시각에 입각하여 풀어냈다. 당시 쓰인 사료를 바탕으로 12세기 이슬람군 병사들의 모습과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그렸는데 중간 중간 숨어 있는 야사 또한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흥미롭다.
살라딘의 진가는 십자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드러난다. 그는 예루살렘의 건물들을 파괴하지 않고 원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또한 기독교도들이 예루살렘을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하고 위병들에게 그들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명령했다. 사료에 의하면 살라딘은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나이 많은 부모와 함께 떠나는 프랑크인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짐과 노부모를 실을 동물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고 한다. 저자는 예루살렘 안의 기독교도들이 이런 살라딘의 모습을 보고 그의 자비를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짐작한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도 기독교 세계의 주요 도시들이 살라딘에게 넘어갔으며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성이 늘어났다. 이는 살라딘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란 공감대가 기독교도 사이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살라딘은 전술이 뛰어나거나 빼어나게 유능한 장군이었다고 보기 어렵지만 스스로 세운 도덕적인 원칙을 철저히 지켰기에 대규모의 십자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무슬림이었던 살라딘은 종교를 뛰어넘어 오랫동안 유럽에서 관대한 군주의 표상으로 그려졌다. 각 국가에서 살라딘 전기가 쓰이고 여러 문학 작품에 ‘관용의 상징’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저자는 살라딘을 ‘신뢰’라는 키워드로 압축하여 흥미롭게 선보인다. 시대를 초월하여 적에게조차 기사도 정신의 본을 보인 살라딘의 삶은 특히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상당하다고 할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학습’: 절망을 위대함으로 바꾼 사상가
지난 500년 동안 ‘교활함’과 ‘이중인격’ ‘불신’의 대명사로 불렸던 인물이 있다. 도덕주의자, 보수주의자, 급진적 혁명가 모두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는 역사에서 수없는 오해와 오독을 낳은 사상가다. 리더십에 대한 불세출의 저작에 가려진 그의 삶을 저자는 ‘학습’이라는 열쇳말로 집약하여 표현했다. 과연 마키아벨리의 진짜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젊은 시절, 마키아벨리의 삶은 순탄했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498년, 피렌체의 80인회가 29세의 마키아벨리를 시의 제2서기장으로 선출하면서부터다. 정치적 경험이 거의 없었던 마키아벨리를 정치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고위직에 임명한 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구축한 권력층과의 네트워크 때문이었을 것이라 역사학자들은 추측한다. 그렇게 14년 반 동안 이어진 공직 생활 중에 마키아벨리는 ‘외교사절’로서 빛나는 활약을 했다.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 궁정, 이탈리아의 실력자 체사레 보르자를 만나 권력의 얼굴을 마주했고 이 경험은 훗날 『군주론』을 쓰는 밑거름이 됐다.
마키아벨리는 경험에서 배운 많은 것을 책으로 집필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끊임없이 ‘학습’했다. 그러나 1512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공화정이 붕괴되고 메디치 가문이 18년 만에 권력을 잡자 탄탄대로였던 그의 삶에 위기가 찾아왔다. 스스로 “모든 것을 잃은 뒤”라고 묘사한 이 시기에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해임되었으며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까지 받았다. 저자는 이 끔찍했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군주론』에 투영되었고, 위대한 정치적 존재를 향한 마키아벨리의 광대한 열망도 이때 구체화되었을 것으로 본다.
말년의 마키아벨리는 선술집에서 사람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도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가면 의관을 정제하고 독서를 하며 고대의 현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책을 읽으며 가난과 굴욕을 잊으려 한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19년간 집필한 『군주론』은 각종 교훈을 담고 있으며 많은 ‘지배자의 스승’이 되어 현재에도 널리 읽히고 있다. 그의 묘비에는 ‘명성에 상응하는 찬사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그루시의 ‘맹목’: 국가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다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가 ‘맹목’적이고 무능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유럽의 운명이 걸려 있던 중요한 전투에서 결정적인 실책을 범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한 사람을 소개한다. 바로 프랑스의 에마뉘엘 드 그루시Emmanuel de Grouchy 원수다.
1815년 6월, 벨기에 남동부에 위치한 워털루에서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영국의 웰링턴을 선봉으로 한 연합군의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나폴레옹에 맞서 유럽의 패권을 손에 쥐기 위해 네덜란드를 비롯한 프로이센, 합스부르크 그리고 러시아까지 무장을 갖추고 프랑스군의 길목을 조여 왔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는 적군이 모두 모이기 전 공격을 개시해야 했지만, 말과 장비는 여전히 부족했고 경험이 없는 어린 병사가 군대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나폴레옹의 건강 상태는 점점 나빠져만 갔다. 결국 그는 최후의 일격을 앞두고 기병대장 그루시에게 추격 부대의 임무를 맡긴다. ‘프로이센군을 추격하여 웰링턴의 영국군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중요한 미션이었다. 전 병력의 3분의 1을 떼어주며 그루시에게 자신의 운을 모두 걸었던 나폴레옹은 이제 승리의 여신의 미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저자는 복종에 익숙했던 그루시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라 평한다. 그가 ‘피터의 원리(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무능이 두드러지는 수준까지 승진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원리)’의 대표적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루시의 추격 부대가 떠난 뒤,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결사항전 하는 동안 그루시는 나폴레옹의 첫 명령에 집착하며 사라진 프로이센군만을 쫓아 돌아다녔다. 결국 그루시의 오판은 프랑스군의 전패를 불러왔고 19세기 유럽의 운명을 결정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저자는 그루시의 ‘맹목’이 조직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설명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타산지석으로 삼을 것을 촉구한다. 성실하고 충실했지만 자율적이지 못하고 고집스러웠던 단 한 사람의 지도력이 세계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도 주장한다. 그루시 원수의 사례는 크고 작은 조직을 이끌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스탈린의 ‘변신’: 20세기 괴물의 탄생
제정 러시아 헌병대가 ‘가장 잡기 힘든 인물’로 목록에 올렸던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은 잔혹함 이면에 또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저자는 스탈린이 신출귀몰하게 ‘변신’하는 모습에 집중하여 키워드를 뽑아냈다. 20세기 괴물로 불렸던 스탈린의 ‘변신’은 러시아 역사에 핏빛으로 고스란히 녹아 있다.
스탈린은 레닌이 경계할 만큼 영리했고 자유롭게 행동했으며 편견 없는 유연한 사고로 러시아 정계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저자는 스탈린의 박약한 윤리 의식과 복잡한 여성 편력, 권력을 향한 공포스러운 집착을 지적하며 그가 러시아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어린 시절 스탈린은 신체적 결점이 많은 소년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고 버림받은 이 아이는 사생아라는 소문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이렇듯 스탈린은 사고와 질병이 계속되는 삶을 살았기에 후에 그가 본심을 숨기고 끊임없이 가장假裝하며 ‘변신’하는 삶을 산 것은 불가피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스탈린은 낭만적인 독서광이기도 했는데, 그가 통독했던 책 중에는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도 있었다. 세계의 지도자들이 히틀러가 부상하기 전, 그의 저서에 담긴 주장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스탈린의 지각력은 남달랐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의 권력욕은 일인 독재체제를 구축한 뒤 더욱 심해졌다. 저자는 스탈린이 집권 후 전술적, 기회주의적 견지에서 종교에도 가끔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이는 자신의 신화적 이미지를 고양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스탈린은 한때 동료였던 이들을 가차 없이 숙청하였으며 1억2500만 명의 농민을 시베리아 등지로 강제 추방하여 소련의 기근 확산을 불러오기도 했다. 1929년부터 1953년까지 스탈린 치하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는 3500만 명에 육박한다. 대숙청 시기를 거치며 소련 사회의 모든 정부 조직과 정당, 공장, 문화기관, 군대 조직의 사람들은 대거 물갈이되었고 그 빈자리는 스탈린의 사람들이 장악해나갔다. 소련은 급속히 파편화되었다. 이와 비례하여 스탈린 독재 체제는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집권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스탈린의 다양한 모습과 끔찍했던 20세기 러시아의 여러 사건을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이를 통해 ‘20세기의 괴물’이라 불렸던 스탈린의 외피가 한 꺼풀 벗겨지며 그의 진짜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