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읽어온 그 모든 『일리아스』를 망각하게 될 것이다
가족희비극, 무협활극, 아침드라마, 전쟁영화,
온갖 장르가 범벅된 스펙터클로서의 『일리아스』를 만나다
이 책은 시인, 소설가, 전직 교수이자 자타공인 ‘전쟁 덕후’인 저자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현대의 감각으로 재해석해 써내려간 것이다. 아킬레우스, 헬레네, 아테나와 제우스 등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들의 이름에는 익숙하나 정작 우리는 ‘고전’ 『일리아스』를 제대로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저자는 그것이 『일리아스』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이제껏 『일리아스』가 읽히고 소개되어온 방식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새로운 『일리아스』를 들려주겠다며 이야기 배달꾼을 자처한다. 본래 모닥불가에 모여 앉아 함께 나누던 옛이야기로서의 『일리아스』의 본질을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이 책은 원전보다 더 원전의 속성에 가깝게 전투 장면을 보강하고, 이야기에 담긴 신과 인간의 감정들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도록 현대의 언어 감각에 맞춰 각색했다. 책을 펼치면 덮을 수 없을 만큼 빠져들도록 새롭게 그려낸 고전 스펙터클로서의 『일리아스』를 접하고자 한다면 이 책이 안성맞춤이다.
다들 이 이야기를 『일리아스』인가 뭔가 하는 제목으로 들어봤지 싶다. 대학 강의 요강 같은 데 나오니까. 그런데 사실 이건 교과서에 실으라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모닥불 피워놓고 둘러앉아 밤새 늘어놓는 이야기, 허풍 떠는 데 최적인 이야기지. 노골적인 슬랩스틱코미디인가 싶더니, 어느새 초강력 폭력물로 바뀌고, 다음에는 꾸역꾸역 페이소스를 자아내 어쩔 수 없이 눈물 콧물 짜게 만드는 신파로 넘어가는 식이다. _9~10쪽
‘전쟁 덕후’가 들려주는 가장 날것의 『일리아스』
저자 존 돌런은 1997년부터 2008년까지 러시아에서 발간된 영문 격주간지 『디 이그자일The eXile』의 공동 편집인으로 있으며 군사전략과 세계사 속 전쟁사를 분석하는 칼럼을 연재했다. 현재 팟캐스트 〈라디오 전쟁 덕후Radio War Nerd〉를 운영하고 있을 만큼 이름난 전쟁 덕후다. 그런 그가 새롭게 다시 쓴 『신과 인간의 전쟁, 일리아스』는 인물들의 일상이나 로맨스보다 전투의 액션 묘사에 공을 들이는 등 전쟁 이야기로서의 속성을 보다 강화하였다. 온갖 방법으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펼쳐지는데, 잘 쓰인 전쟁 이야기가 언제나 그러하듯 잔혹하고 악독하며 인정사정없다.
더불어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대장정은 한없이 가벼운 유머들로 그 완급이 조절된다. 저자는 수다스럽고 걸쭉한, 능글맞고 아이로니컬한 입말을 살려 전투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농담을 선보인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 묘사는 해학적인 유머를 통해 긴장감이 풀어지기도, 잔악함이 배가되기도 한다.
트로이인들은 오늘 온갖 기이한 무기를 총동원하고 있다. 페이산드로스가 커다란 쌍두 도끼를 흔들며 메넬라오스를 향해 돌진하지만 메넬라오스 역시 튼튼한 그리스산 창을 들고 기다리다가 잽싸게 상대의 얼굴을 찌른다. 페이산드로스의 머리가 점토로 만든 주발처럼 깨진다. 눈알이 튀어나와 흙먼지 속으로 또르르 굴러가자 그리스인들은 눈알을 가리키며 웃고 환호한다. “너 눈알 떨어졌다!” _213쪽
하지만 가장 날것의 『일리아스』라 하여 그저 가볍거나 선정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저자는 혹독하고 가혹한 핏빛 장면들에서 드러나는 인간들의 또다른 모습에 주목한다. 적의 시체만큼 아군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전쟁이고, 만약 오늘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가 있다면, 그자는 삶에 대한 애착뿐 아니라 누군가의 상실 또한 견뎌내야 한다. 슬픔과 회한 역시 전쟁의 속성임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3000년 전의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감정의 원형들, 진득한 페이소스
왜 지금 몇 천 년 전의 고전을, 심지어 현대의 언어로 각색한 책을 읽어야 할까? 인간들은 그저 신의 꼭두각시인 것만 같고, 트로이전쟁은 어처구니없게도 한낱 욕망과 질투에서 시작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와 같은 진창 속에서 슬픔, 분노, 환희, 애틋함, 회한 같은 감정의 원형들이 각 인물의 구체적인 사연을 통해 구현된다. 인물들에게 사소하게나마 부여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숱한 감정들의 면면과 마주하게 된다.
책은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싸우곤 더이상 전쟁에 참여하길 거부하는 아킬레우스로부터 시작한다. 점점 그리스측이 불리해지자 아킬레우스의 절친한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전쟁에 참여하지만, 결국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에게 목숨을 잃는다. 그후 책의 서사를 이끄는 건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저자는 서문에서 『일리아스』에 ‘분노의 서’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분노의 이면에는 크나큰 슬픔과 회한이 있으며 독자는 바로 이 슬픔을 통해 그를 이해하고 그에게 공감하게 된다. 수많은 감정이 농밀하게 형상화되어 이곳저곳에 포진해 있다. 그 결을 따라 진득한 페이소스가 번져오는데, 이를 통해 독자들은 자신 또한 지녀왔으나, 계기가 없다면 드러나지 않을 온갖 감정의 행태를 헤아려보고 뒤집어보며 그 안에 자신을 들여놓게 된다. 감정의 원형을 이야기 속 타인을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데, 이것이 3000년 전의 고전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이유다. 책을 덮고 나면 헥토르의 시신을 둘러싸고 울려퍼지는 트로이인들의 슬픔과 애가를 듣게 될 것이다. 몇 천 년을 뛰어넘어 여전히 이어지는 인간들의 녹진한 감정이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 당도한다.
아흐레 동안 황소들이 모래흙에 깊은 바큇자국을 남기며 나무 몸통을 실어나른다. 열흘째 되는 날 새벽에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고, 프리아모스는 아들들에게 하루종일 그 주위를 걸어다니며 나뭇가지와 뼈가 잘 타는지 지켜보게 한다. 다음날 아침에는 커다란 포도주 항아리를 들고 와서 타다 남은 장작에 붓는다. 포도주와 나무와 살이 타는 냄새가 안개에 실려 도시 전체에 퍼진다. 이제 헥토르의 형제들이 그의 희고 깨끗한 유골을 수습해 시돈산産 자줏빛 천에 잘 싸서 항아리에 넣는다. 납작한 큰 바위로 안을 받친 무덤에 유골 항아리를 넣고 그 위에 무덤을 세운다. _4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