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 성장 소설 『키르케』
“맨 처음 태어났을 때 나에게는 걸맞은 이름이 없었다.”
님프 키르케
키르케는 매들린 밀러에게서 목소리를 부여받았지만, 시작부터 이름조차 없다. 티탄 족 최고의 신인 태양신 헬리오스를 아버지로 두었고, 영어를 비롯한 많은 언어에서 바다를 뜻하는 단어의 어원이 된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를 외할아버지로 두었지만 그녀는 하급 여신 중에서도 가장 말단을 차지하는 님프일 뿐이다. 아버지들의 계보에 키르케는 없다.
님프가 가진 유일한 힘은 타고난 미모이다. 미모로 남신과의 결혼을 도모하고, 그를 통해 신들의 모임에서 한 자리 꿰차는 것이 님프의 유일한 생존법이다. 이들은 남신들의 무력에 수시로 노출되기도 하며,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님프 키르케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머니로부터 외면 받고, 눈이 노랗고 목소리가 특이하고 가늘다는 이유로 형제들로부터 조롱당한다. 키르케는 이들을 피해 아버지 헬리오스의 신전에서 그의 숨결을 느끼는 걸 좋아한다. 아버지 옆에 앉아 그의 능력에 감탄하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봐야 바라보기만 해도 장작을 재로 만드는 아버지 헬리오스의 기본적인 능력조차도 키르케에게는 없다. 아니, 자신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여긴다.
마녀 키르케
그러다 인간 남자 글라우코스를 만나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키르케의 능력은 남신들 입장에서 ‘재앙’이며, 이런 능력을 가진 하급 여신은 신으로 격상되는 게 아니라 ‘마녀’로 불릴 뿐이다. 신들은 키르케를 무인도인 아이아이에 섬으로 유배하기로 결정한다. 이 섬에서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 키르케는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는 기회로 활용한다. 이 섬에 신과 인간들이 찾아든다. 그리고 마녀 키르케의 서사가 시작된다.
『키르케』는 여성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키르케는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서서히 성장한다. 인간에게 불을 선사한 프로메테우스는 키르케가 가장 처음 만나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 상대로 등장한다. 그는 키르케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아주 살짝 공개한다.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
● 기존 질서를 뒤집는 것만으로 우리의 삶은 바뀌지 않는다, “어떻게”가 중요하다.
키르케는 “어떻게 뒤집는가”를 이야기한다
소설 『키르케』에는 그리스 신화 속 유명인사들이 등장한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 전령의 신 헤르메스, 미로를 만든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 테세우스를 도와 미노타우로스를 제거하는 아리아드네, 이아손을 향한 복수로 이글거리는 메데이아, 그리고 교활한 오디세우스까지.
신화 속 주요인물들은 키르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키르케의 계보만 따라가도 그리스 신화의 대부분을 알게 되는 셈이라, 그동안 키르케를 주변부에 둔 것이 의아할 정도이다.
키르케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딸이자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의 외손녀이다. 다이달로스를 잡아둔 크레타 왕 미노스의 부인 파시파에가 키르케의 여동생이다. 파시파에의 딸이자 테세우스에게 배신당하고 디오니소스의 신부가 되는 아리아드네는 조카딸이다. 황금양털을 갖고 있는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가 남동생이다. 아이에테스의 딸로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돕는 메데이아 역시 조카딸이다.
누구를 중심으로 계보를 그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이는 ‘여성서사’에서 종종 보이는 관점이다. 기존의 관점을 뒤집는 것이다. 매들린 밀러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
『오디세이아』에서 키르케는 마법을 써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는 마녀이며 극복해야 할 존재이지만, 소설 『키르케』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 헤르메스, 다이달로스,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와 동반자적 관계를 맺는다. 이는 키르케이기에 가능한 뒤집기이다. 매들린 밀러는 ‘내’가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을 남성세계의 방식과 달리함으로써 소설 『키르케』를 명작으로 만들었다.
신은 인간에게 은총을 내리며, 그 댓가로 미션수행을 요구하는 존재다. 인간 역시 신에게 선택받기 위해 기꺼이 고난의 행군에 합류하며 타인의 피와 자신의 땀을 제물로 바치는 존재다. 고결한 미션수행,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필연적 고난, 피와 땀으로 이뤄낸 성공, 그렇게 얻어지는 명예와 불멸의 생, 이것이 기존 신들의 질서에서 말하는 진정한 삶이다.
여신이자 마녀인 키르케는 댓가 없이 상대방을 돕는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할 필요가 없는 다른 신들과 달리 조금씩 성장한다. 키르케의 성장은 대단히 극적이지 않지만, 대단히 아름답다. 성장할 필요가 없는 존재인 신의 성장이기에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우리의 삶도 이토록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마저 품게 한다.
이렇듯 소설 『키르케』는 그리스 신화가 우리에게 말해왔던 ‘진정한 삶에 대한 정의’를 뒤집는다.
우리는 다시 쓰인 고전을 읽음으로써 우리 삶 자체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누구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는 선택해야 한다.
키르케는 마법은 어떻게 하면 생기는지 묻는 남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법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야. 자기 스스로 찾지 않으면 못하는 거야.”
여성독자라면, 아니 그동안 키르케처럼 숨죽이며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왔던 당신이라면 이제 자신만의 마법이 되어줄 이야기를 찾아나서는 건 어떨까. 소설 『키르케』는 그런 이들에게 마법 같은 이야기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