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제1부는 다나카 마사노스케田中正之助와 가노 야스마사加納安正가 공저한 『포항지』를 주석과 함께 번역한 주해서로 구성했고, 제2부는 『포항지』 발간 전후의 포항에 관한 사료들을 모아 구성했다. 『포항지』는 당시 포항읍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므로 현 포항시 행정구역에 속한 영일군에 대한 정보가 많이 누락되어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장별로 소개가 미흡한 부분은 1936년 발간된 『경북대감慶北大鑑』(쓰지 스테조逵捨藏 편저)의 자료를 추가하여 보완했다. 제2부에서는 1940년대 초의 창씨개명, 광복 이후 일본인의 철수, 1949년 포항시 승격 시점까지의 관련 자료를 담았다. 다만 부록의 연표 범위는 휴전이 조인된 시기까지로 잡았다. 이는 6·25전쟁으로 포항 시가지가 거의 초토화되어 휴전 이후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포항지』 원문에 없는 내용(사진 포함)은 ‘*’ 표시와 함께 색을 달리하여 구분했다. 원문 자체의 오류는 바로잡은 후 주석으로 설명을 붙였으며, 존칭과 호칭은 대부분 생략했다. 가독성을 위해 내용의 중요도에 따라 편집의 변화를 꾀했다. 예컨대 『포항지』 원문에는 본문으로 다루었으나 그 내용이 부수적인 부분은 구성을 달리했다.
또한 일제가 조선인의 평균 체격을 측정하기 위해 남녀별로 모아놓고 찍은 사진, 1920년대 포항 나카초仲町 설경, 포항의 발전상과 변화를 한 눈에 보여주는 지도, 포항 구도심지의 초기 형성을 알 수 있는 지도, 1931년 2월 포항역에서 청어를 출하하는 광경, 1910년대 헌병출장소로 사용된 영일현청 사진 등 희귀한 사진 자료도 많이 담고 있다.
철저한 내용 검증을 통한 향토사 연구의 모범적 전형
당대의 여러 자료를 통해 『포항지』의 내용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 가능성을 포착하기도 했다. 우선 1930년대 중반 일본이 러일전쟁과 만주사변에서 죽은 일본군을 추모하는 (또한 죽어서도 일왕에게 충성하겠다는 전사자의 다짐을 드러내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운 충혼비가 묘한 용도로 재활용되었다는 점이다. 그 재활용처는 다름 아닌 6·25전쟁에 참전한 미 해병 제1비행단 전몰 용사를 기리는 충령비다.(이 점은 기사화되기도 했다.)
또 다른 사실은 포항의 모갈산(수도산)에 남아 있는 저수조에 새겨진 휘호에 관한 것이다. ‘수덕무강水德無疆’이라는 휘호 옆에 새긴 서명은 현재 훼손되어 있지만, 조사 결과 그 서명의 주인은 일제강점기 당시 총독으로 활동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일 가능성이 있다. 이 또한 향토사 연구의 자그마한 성과라 자부한다.
선조의 발자취가 담긴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으면서, 한일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눈앞에 걸리는 문제를 하나씩 치우는 식은 능사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과연 어떠한 목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 남아 있게 되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작업의 결과는 후손들이 올바른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하는 교재로 활용되어, 역사의 진실과 현실을 함께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엄격한 내용 검증의 실례
『포항지』에는 일본인 저자들이 사실을 왜곡했거나 의도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치부하거나 생략해버리는 내용도 많이 나온다. 이번 책은 이런 부분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자세한 주석을 통해 그 실상을 제대로 알려주는 데 가장 큰 특징이 있다. 가령 본문 49쪽을 보면 “조선 시대에 들어 태종왕 때 연일에 진鎭을 설치하여 성을 짓고 병마의 구비도 완비했으나, 이것은 그다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아니다”라고 쓰고 있는데 편역자 김진홍은 주석을 달아 “특기할 만한 사실이 아니라고 폄하하고 있으나, 이것이야말로 포항 지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곳에 설치한 연일진은 말하자면 해병사단 안에 배치한 육군이다. 진鎭은 군사적 요충지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조선 시대에 이미 영일만 또는 연일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또한 본문 162쪽에서 3·1운동을 “만세 소란”이라고 반복적으로 지칭한 것에 대해서도 “3·1 만세운동을 ‘만세 소란’이라고 표현한 데서 일본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영일군 포항읍에서 송문수宋文壽, 최경성崔景成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 운동이 있었으며 주동자 5명이 피검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독립운동사』 3, 국가보훈처 442쪽) 『포항지』는 포항에 이러한 사태가 없었음을 강변하기 위해 고의로 누락시킨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