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생존을 위한 최고의 희망은 회복력,
즉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터무니없는 일을 직시하는 능력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렸던 희망을 거짓말처럼 되찾았으니,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워싱턴 포스트, 가디언, 커커스 리뷰,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하퍼스 바자, 내셔널 포스트 선정 ‘2015 올해의 책’
혼돈과 광기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루슈디식 천일야화
가까운 미래, 강한 폭풍우가 사흘 밤낮 동안 뉴욕을 강타한 뒤, 귓불이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기이한 능력이 생긴다. 정원사 제로니모는 지면에서 몸이 9센티미터나 떠올라 도무지 땅을 딛지 못하고, 그래픽노블 작가 지망생 지미에게는 자신의 그림이 형상을 가진 실체가 되어 나타난다. 아기 스톰은 주변 사람들의 부정부패를 단번에 알아내며, 이별 통보를 받은 테리사는 번개를 쏘아 연인을 단죄한다. 본인들은 모르지만 이들은 모두 마족의 후손들이다.
마족jinn. 그들에 대해 누구나 아는 이야기가 있다면 아마도 알라딘에게 아름다운 대지가 딸린 궁전을 선물하여 아름다운 연인 바드랄부두르 공주와 알콩달콩 살게 해준 램프의 요정genie이라고 불리는 정령일 테다. 루슈디가 『2년 8개월 28일 밤』에서 그리는 마족은 램프에 갇혀 인간과 주종 관계를 맺는 요정보다 더 막강하고 교활한 존재다. 팔백오십여 년 전, 12세기에 이 마계의 공주 두니아가 이슬람 철학자 이븐루시드를 사랑해 엄청나게 많은 자식을 낳았고, 이들은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모르는 채 대대로 인간세계에 널리 퍼져 살고 있었다.
그러다 뉴욕에 불어닥친 강력한 폭풍우 이후 인간세계와 마족세계 사이를 잇는 통로가 뚫렸고, 이때를 기회삼아 악한 마법을 쓰는 흑마신들이 인류를 노예로 삼으려 인간세계로 침입한다. 도시의 정상적 활동이 마비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느닷없이 터무니없는 일들이, 괴사怪事가 끊이지 않는다. 프랑스의 한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하나둘씩 코뿔소로 변해갔고, 아일랜드 노인들은 쓰레기통에서 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한 공무원은 코를 잃어버렸다가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코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이상한 일들은 시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특별한 신호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래서 온갖 괴사가 일어나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는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세계의 틈새가 벌어진 이때, 마족 공주 두니아 역시 옛 연인을 되찾으려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이미 무덤에 들어간 연인 이븐루시드는 두니아에게 부디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모아달라고, 그리하여 다가오는 세계대란을 막아내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두니아는 귓불이 없는 자신의 후손들을 찾아가 그들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들을 한데 모아 극악무도한 흑마족을 상대로 맞서기로 한다. 인류를 대표하는 어벤져스의 탄생이며 이계二界전쟁의 시작이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천 일 하고도 하룻밤, 그러니까 장장 2년 8개월 28일 동안 이어지는데…… 과연 인간은 사악하고도 무자비한 마족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까?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환상소설의 외피를 쓴 본격 철학소설
인류를 구하기 위한 두니아와 그 후손들의 화려한 활약상으로 『2년 8개월 28일 밤』은 얼핏 『천일야화』의 신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간계와 마계의 전쟁을 다루는 본격적인 환상소설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전쟁의 발단과 양상을 들여다보면 환상소설의 외피를 쓰고 비이성과 이성의 대립을 담아낸 철학서에 가깝다.
두 세력의 다툼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살펴보면, 애초에 흑마신을 깨워 세상을 단죄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두니아의 연인, 이븐루시드의 사상적 숙적 투스의 가잘리다. 신앙만을 신봉했던 가잘리와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던 철학자 이븐루시드는 절명한 뒤에도 토론을 계속하며 이계전쟁을 관전하기도 한다.
이븐루시드가 가잘리에게, 티끌이 티끌에게 말했다.“비이성은 비이성인 까닭에 자멸하기 마련이오. 이성이 잠깐 토막잠을 잘 때도 있지만 비이성은 아예 혼수상태에 빠질 때가 많으니까. 결국 비이성은 영원히 꿈속에 갇혀버리고 마침내 이성이 승리할 거요.”
그러자 가잘리가 말했다. “인간이 꿈꾸는 세상은 자기가 만들고 싶은 세상일세.”210쪽
가잘리의 티끌이 이븐루시드의 티끌에게 말했다. “혼비백산한 남녀노소가 사원마다 겁에 질린 몰려들어 신의 보살핌을 갈망하는군.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야. 인간을 신에게 떠미는 것은 두려움일세.”243쪽
합리주의를 배척하고 신앙만을 신봉하는 가잘리가 불러들인 마족은 비이성을, 이븐루시드의 후손이 수호하는 인간계는 이성을 대변한다. 결국 2년 8개월 28일에 걸친 이계전쟁은 비이성과 이성의 지난한 대리전이자, 서로에게 날카롭게 창을 겨누는 결투장이 된다. 루슈디가 책이 시작되기 전 프란시스코 고야의 동판화로 문을 연 이유가 바로 이해되는 지점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한 최고의 희망은 회복력,
즉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낯설고 터무니없는 일을 직시하는 능력이다.”
인간다움을 회복해야 할 현재에 던지는 거장의 메시지
작가 살만 루슈디는 21세기의 지금 현재를 인간의 교만이 팽배해진 때이며, 이성과 비이성이 대립하는 전쟁터로 보고 있다.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장소, 신념, 사회, 국가, 언어는 물론이고 심지어 더욱더 중요한 명예, 도덕, 판단력, 진실 등으로부터도 쉽사리 분리되었다. 저마다 자기 삶의 참된 이야기에서 떨어져나가 엉뚱한 가짜 이야기를 발견하거나 날조하려 노력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7쪽
“두려움만이 죄 많은 인간을 하느님께 이끌어줄 수 있소. (중략) 인간의 교만이 팽배한 곳, 인간이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는 곳, 그런 곳을 찾아가 무기고와 환락가를, 그리고 기술과 지식과 재산을 떠받드는 신전을 때려부수시오.”190쪽
그가 작가로서 감지한 위기의식과 그에 대한 고민이 이계의 전쟁 양상으로 그려졌으며, 그는 소설 속에서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한다.
마족의 사악하고 극악무도한 모습은 곧 인간의 극악무도하고 사악한 일면을 비춰주는 거울과 다름없음을 깨달았고, 인간의 본성에도 똑같은 무분별이 있어 무자비하고 괴팍하고 악의적이고 잔인함을, 마족과의 싸움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닮았음을, 따라서 마족은 현실인 동시에 추상적 개념임을, 그들이 하계로 내려오면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근절해야 하는지 보여주었음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바로 비이성이었고, 비이성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는 흑마족의 이름이었고, (중략) 마족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무분별도 물리쳐야 비로소 이성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3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