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기념비적인 강연록
오랫동안 인문학 교육에 힘써온 교수로서의 신념고백
“이 강연은 필경 신념고백 같을 겁니다... 선언적인 앙가주망, 신념고백의 형태를 띤 호소가 될 것입니다. 이 신념은 곧 대학에 대한 믿음이고, 대학 내부에 존재하는 내일의 인문학에 대한 믿음입니다.” _자크 데리다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꼽히는 자크 데리다는 철학과 교육, 대학의 역할과 그 변모와 갱신을 위해 평생을 바쳐 이론적 실천적 탐구를 이어온 철학자다. 1957년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해 말년까지 40년 남짓 소르본, 고등사범학교,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을 비롯해 예일대, 캘리포니아대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나, 소위 ‘대학université’에 소속되어 대학 교수직에 정식으로 임용된 적은 없었다. 1974년 철학교육연구그룹GREPH을 결성했는가 하면, 1983년 미테랑 정권 당시 국제철학학교 설립에 참여해 1985년까지 책임자로 있었다. 철학 및 인문학 교육이 불가피한 근본적인 이유, 그 역사적 조건과 기능 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그의 오랜 활동과 탐구는 프랑스 교육정책 전반에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하였다.
이 책은 이런 연장선상에서 나온 활동과 사유의 결과물로서, 1998년 4월 캘리포니아 스탠퍼드대학에서 영어로 발표했던 연속 특강을 정리해 2001년 프랑스 갈릴레출판사에서 펴낸 강연록이다. 강연 주제는 “근대 대학은 조건 없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선언에서 출발해, 내일의 대학 즉 새로운 인문학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교사-교수라는 이 직업(일, 노동)은 무엇을 수행하기 위한 자리인가 하는 물음이 핵심이다.
데리다는 “진리를 직업으로 삼는” 대학에서, 특히 진리의 위상과 변화를 논하는 인문학 안에서, 오늘날 세계화와 사이버 시대에 대학이 처한 위기를 성찰하며 “사유의 사건”으로서의 새로운 인문학과 그 존재양식의 확장을, “조건 없는 대학”을 선언한다. 대학은 어떻게 저항과 불화의 힘으로 무조건적인 자유를 긍정하고 주권 가치를 획득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대학은 주권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조건 없는 대학이란 가능한가? 철학이든 문학이든 법이든 왜 대학과 연관한 사유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또한 대학에서의 직업은 무엇을 말하며 가르치는 자는 무엇을 수행하는 자인가? 인간에서 출발한 인문학, 진리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한 대학은 왜 무한한 토론을 위한 최후의 보루, 마지막 장소여야 하는가? 이런 긴박하고도 근원적인 문제를 건드리며, 데리다는 이 책에서 철학과 인문학을 가르치는professer 직업profession을 가진 교수professeur로서 자신의 내밀한 “신념고백profession de foi”을 털어놓는다. 모두 같은 언어 뿌리에서 나와 역사적으로 변천해온 이 개념의 계보를 해체해나가며, 말년의 데리다는 이 얇고도 강렬한 책을 통해 고백하고-공언하고-가르치는 자로서 내일의 대학과 인문학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신실히 드러내고 있다.
조건 없는 대학: 내일의 대학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탈구축 작업
데리다는 오늘날 국가권력, 경제 권력, 종교-문화-미디어 권력에 끊임없이 위협받는 대학에서 글쓰기, 작품 생산 등 사유의 사건들을 구성해내고 비판적 질문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이 그간 주창해온 ‘탈구축déconstruction’의 권리를 말한다. 대학은 그 어떤 질문도 피해갈 수 없는 장소로서, 공적으로 “모든 것을 말할 제1의 권리”를 가져야 하며, 이로써 그는 “대학 스스로가 동시에 고찰하고 고안하고 제기해야 하는 어떤 법-권리”로서의 무조건적인 저항의 원칙을 따르는 “조건 없는 대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표제로 쓴 이 말은 무엇을 내포하는 말인가?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제가 ‘대학’을 말하는 이유는, 대학의 독립성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여타 종류의 경제적 이익과 목적에 복무하는 모든 연구기관과 대학을 엄밀한 의미에서 구별해두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제가 ‘무조건적인’이란 말만큼이나 ‘조건 없는’이란 말을 한 이유는 ‘권력 없는’ 혹은 ‘방어하지 않는’이란 뜻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대학이 절대적으로 독립적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노출되어 제공되는 성채이기 때문입니다.”(21~22쪽)
그러면서 동시에 “조건 없는 대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시인하면서도 불가능한 것의 가능한 장소로서 대학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무조건성의 원칙이 현존하고 있는, 불가능을 사유하는 사건의 장소가 바로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무엇보다 내일의 인문학, 새로운 인문학에서 일어나는 중인 ‘사건’이란, 의미나 위상의 변화를 가져오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마치 ~인 것처럼comme si”(우화와 문학의 요소)과 “그 자체로서coome tel”(철학, 현상학, 존재론의 조건)라는 표현을 통한 이 책의 성찰에서 보듯, 현재에 침입해 그 문법의 지평을 파열시키는 탈구축의 문구로서 (니체로부터 참조한) ‘아마도’의 범주에 속한다고 덧붙인다. 오늘날 원격노동과 가상현실화하고 있는 과학기술혁명의 진화가 불러온 세계에서 점점 방향을 잃어가는 대학 교육과 공동체가 모여 토론하는 장소(캠퍼스) 경험의 모색에 대한 성찰을 촉발하며, 탈구축을 통한 도래할 대학, 도래할 인문학, 도래할 민주주의를 사유하기 위한 ‘만약’ 역시 ‘아마도’와 비교하며 데리다가 원용하고 있는 말 중 하나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이들 표현들에 대한 사유를 통해 새로운 인문학을 재고안해낼 다양한 양태의 가능성을 진단하고 있다.
진리를 직업으로 삼는 대학에서 가르친다는 것의 행위수행성이 지닌 의미,
새로운 인문학은 무엇을 사유할 것인가?
특히 데리다가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이, 철학과 인문학 교육을 수행하는 교수-교사의 직업 행위와 관련한 수행성 문제다. 이 대목에서 데리다는 J. L. 오스틴의 진위진술적인 것과 행위수행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끊임없이 대비함으로써,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수완과 전문능력 및 지의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닌 책임을 지는 앙가주망으로서 교직(자)의 행위수행성을 문제삼는다. 즉 데리다는 가르치는 자를 가리켜 “자신이 이러저러한 자라고 선언하고, 이를 자처하고, 약속하면서, 자신을 내어주는 일”로서 정의하며, 그 행위를 여타의 일, 노동과 비교하고 그 개념의 역사를 분석함으로써 행위수행적 실천적 직업으로서의 미래를 사유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도래할 인문학의 장을 스케치하며, 자신의 “일곱 개의 테제, 일곱 개의 명제, 일곱 개의 신념고백”을 내비치고 있다. “내일의 인문학은, 모든 학과에서 각각의 역사를 과목 구축으로 제도화하고 그것들을 공존하게 했던 개념들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는 말과 더불어, 그는 새로운 인문학에서 다루게 될 다음과 같은 근원적 테제를 제시한다. 1 인간의 역사, 인간이라는 개념, 인간의 형상, 그리고 “인간 고유의 것”(인권, 여성인권, 인간의 법-권리). 2 민주주의와 주권 사상의 역사(국제법, 국민국가나 주권과 그 한계를 다루는 주권 개념의 탈구축과 무조건성). 3 professer(공언하다, 가르치다, 고백하다), profession(직업), professorat(교직)의 역사(민주주의를 시민성에서 분리하기, 신학적 관점에서 인민주권을 분리하기). 4 문학의 역사(문학 개념, 제도, 허구, “마치 ~인 것처럼”의 수행성). 5 profession(직업), profession de foi(신념고백), professionalisation(전문직업화), professorat(교직)의 역사(지知의 훈련 장소에 대한 연구이자 진위진술적-행위수행적인 것들의 역사). 6 비판적인 동시에 탈구축적인 “마치 ~인 것처럼”의 역사, 행위수행적 행위와 진위진술적 행위 사이의 정교한 구별의 역사. 마지막으로, 여섯 개의 테제를 넘어서 “사건이나 장소-갖기”로 나아가기 위한 행위수행적인 것의 앞날을 예비하면서 일곱번째 테제를 덧붙이고 있다.
『조건 없는 대학』은 자본과 산업에 점점 매수당하고 수익성이 보장된 순수과학이나 응용과학에 자리를 내주며 밀려나고 있는 오늘의 대학과 인문학 교육에 대해 큰 울림을 선사하는 책이다. 대학의 독립성과 학문장의 자율성을 위해 저항하고 불화하는 힘을 역설하며 믿음과 약속과 참여 행위로서 선언하는, 그리하여 다시 미래를 바라보며 사유하도록 촉구하는 가장 긴박하고 절박한 데리다의 메시지가 담긴 책이라 할 수 있다.
【본문 맛보기】
이 강연은 필경 신념고백 같을 겁니다. 마치 어떤 교수가 자기 습관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겠다거나 배신하겠다고 하면서 여러분에게 허락을 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행하는 신념고백 말입니다.(13쪽)
대학은 진리를 직업으로 삼습니다. 대학은 진리에 대해 제한 없는 참여를 선언하고 약속합니다.
확실히 진리의 위상과 변화는, 진리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무한한 토론들(합치로서의 진리나 계시로서의 진리, 이론적-진위진술적 언술 대상이나 시적-행위수행적 사건 대상으로서의 진리 등)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바로 대학 안에서, 그리고 인문학 소속의 학과들에서 특권적인 방식으로 논의됩니다.(14쪽)
저는 “새로운” 인문학을 통해 제가 듣고 이해하는 것을 구체화해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논의는 그것이 비판적인 것이건 탈구축적인 것이건 인간, 인간 고유의 것, 인권, 인류에 반하는 범죄 등과 관련된 물음들 가운데 나오는, 진리에 대한 물음과 역사와 관련된 것으로, 이들 전부는 무조건적인 토론의 장소를, 작업과 재고에 필요한 전제 없는 합당한 공간을, 원칙상 대학 안에서, 무엇보다 대학 내 인문학 안에서, 찾아내야 합니다.(15~16쪽)
조건 없는 대학 같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건 없는 대학은, 원칙적으로 또한 대학이 공표한 소명과 공언한 본질에 근거해, 독단적이고 불공정한 전유를 일삼는 모든 권력에 비판적으로—그리고 비판적인 것 그 이상으로—저항하는, 최후의 장소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17쪽)
대학에는 따라서 저항의 원칙뿐만 아니라 저항의 힘, 그리고 불화의 힘도 필요합니다. 무조건적인 주권 개념의 탈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실제로 진행중인데, 이것이 이제 겨우 세속화된 신학의 유산이기 때문입니다.(23쪽)
저는 이 학술적 유형의 공간이 일종의 절대적 면역, 면책특권에 의해, 마치 그 내부는 침범할 수 없는 것처럼, 상징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합니다... 저는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다시 긍정하고(이것이야 말로 제가 여러분에게 추천하고 여러분의 판단에 맡길 저의 신념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생각을 선언하고, 그 생각을 끊임없이 공언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대학, 특히 인문학의 이런 자유나 면역・면책특권을, 온 힘을 다해 약속하면서 또한 요구해야 합니다. 말이나 선언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노동・연구에서, 행위에 의해, 사건들에 의해, 우리가 일으키는 것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53~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