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작가 한승원이 삼십 년 넘게 준비해온 동화 『어린별』 출간
30년 넘는 문학 인생을 통해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소설가 한승원씨의 ‘어른을 위한 동화’ 『어린별』이 출간되었다. 1997년 한양출판에서 창작동화로 발표된 후에 작가의 오랜 손질과 새로운 삽화가의 꼼꼼한 작업이 어우러져 문학동네의 여덟번째 ‘어른을 위한 동화’로 선보이게 되었다. 그 동안 여러 편의 문학작품들을 통하여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갈등을 생생하게 그려왔던 작가는 이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 속에 삶에서 얻은 지혜와 정수들을 용해시키고 있다. 짧지 않은 작품활동 기간 내내 소설가로서의, 예술가로서의 전언을 화두처럼 끈질기게 붙잡고 있던 작가가 나지막하게 들려주는 동화 속에는 짧지만 깊은 만남을 통해 전해지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깊은 깨달음의 길로 이어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세상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깨달음의 길 찾기, 그 아름다운 방랑
때 묻지 않은 동심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단면들로 가득 차 보일 것이다. 하지만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조각조각 발견한 편린들이 하나의 의미망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아갈 때면 우리는 삶의 신비 앞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된다.
순수와 빛의 상징인 하늘 나라 어린별 공주가 지상으로 유배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지상의 섬들을 여행하면서 하나씩 깨우침을 얻어가는 ‘깨달음의 길 찾기’ 구조를 바탕으로 마흔세 개의 단락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각각의 짧은 이야기 속에는 어린별 공주가 만나는 대상들이 전해주는 다양한 삶의 의미가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자기 나름의 슬픔과 기쁨을 가지고 있단다. 우주 안에 살고 있는 것들은 다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슬프고 외로워야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도 생기는 거야.”(「꿀벌의 섬」)
“허공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지향점이 될 수는 있지만, 우리들이 몸을 일으키는 데에는 직접적인 힘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쓰러져 있게 한 그 더럽혀진 땅을 두 손으로 짚고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는 청년의 섬」)
“잠시 잠깐만이라도 자기의 일상을 떠날 수 있고, 또 그렇게 떠나갔다가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자기의 일상 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그것은 예술적인 행위입니다.”(「학의 섬」)
“나는,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음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사라져주는 것은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야.”(「안개」)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자기가 살고 있는 섬이 바로 그 우주다.”(「소나무의 섬」)
“아무리 외롭더라도, 아무리 슬프더라도,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다른 것들에게서 박해를 받더라도, ……혹시 가슴속에 독을 품지 않도록 하거라. 속에 품은 독은 가시가 된다.”(「가시복의 섬」)
“정말로 보름달을 묶어놓겠다고 소망하면…… 실제 하늘의 보름달은 아닐지라도 그 아이의 마음속의 보름달은 항상 환히 떠 있지 않겠니?”(「새끼 꼬는 젊은이의 섬」)
“세상에는 갇히어 사는 방법과 그 갇히어 있는 곳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사는 방법이 있단다.”(「파랑새가 된 승률조개」)
어린별 공주가 지상에서 만나는 사람과 사물들을 통해서 전해 듣는 이러한 말들 속에는 삶의 진리와 우주의 섭리들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각박한 삶 속에서도 우리들 스스로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지혜의 샘으로 작용한다. 지상에서 처음 만난 꿀벌이 일러주는 삶의 고통을 이겨내는 법에서부터 양파 아주머니로부터 진실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는 것까지 깨달은 어린별은 세상살이의 지혜를 터득하고, 유배가 풀린 후에도 궁극엔 지상의 땅에서 정착하기를 택한다. 작가가 기존의 소설 작품들에서도 강조해왔던 것처럼 깨달음의 길과 그 실현의 지점은 바로 부대낌의 현장, 삶의 터전, 바로 그곳에 있다고 다시 한 번 말하는 것이다.
작가 한승원씨는 30년 전 『어린 왕자』를 처음 접하고 나서 줄곧 이 동화를 구상해왔다. 「후기」에서 “금년에 예순한 살인 나의 전 인생에 걸쳐 얻은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작가의 60년 삶의 경험과 30년 문학활동을 통해 터득한 삶의 진리들을 고스란히 풀어놓아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는 지혜와 용기, 인내, 꿈과 같은 진리들을 한 편의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용해시키고 있다.
황홀한 말들의 잔치 속에서 삶의 등불로 작용하는 깨달음의 화두
소설가 윤대녕씨는 “이 작품을 읽어가는 동안에 문득문득 생각을 멈추고 저 황홀한 말들의 환영에 행복하게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나 『화엄경』의 선재 소년과 같이 깨달음의 길 찾기를 기본축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또하나 놓칠 수 없는 것은 곳곳에 스며 있는 아름다운 말들의 잔치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오래 전에 잃어버린 듯하던 들판의 꽃이나 나무들, 물고기, 바람, 하늘 등에 적절하고 애틋하게 붙여진 이름은 단순한 말의 의미를 뛰어넘어 예로부터 전해오는 선조들의 자연과 우주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화두와 같이 작용한다. 한 편의 동화를 통해서 보석과도 같이 빛나는 말들의 바다 속에 감추어진 삶의 지혜와 생명과 우주의 섭리를 발견해가는 것은, 윤대녕씨의 표현대로 “우리가 긴긴 어둠의 세계를 살아가는 데 먼 등불처럼 삶에 작용한다”. 이것은 또한 시대와 삶을 관통하는 진리가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영원히 이어져오듯, 잠시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하던 깨달음들이 먼 옛날의 신화처럼 다시 살아나 각박하고 분주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화두 하나씩을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