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배반을 꿈꾸는 작가 박범신의 8년 만의 신작 장편소설
‘질주하는 감수성’에서 ‘영혼의 리얼리티’로 회귀하는 박범신 문학의 새로운 탄생
‘감수성의 황제’ ‘타고난 이야기꾼’ ‘이문열, 최인호와 더불어 자타가 공인하는 현역 최고의 대중적 인기작가의 한 사람’으로 불리던 박범신! 1978년 『죽음보다 깊은 잠』이 30만 부 이상 읽히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이후 『풀잎처럼 눕다』 『숲은 잠들지 않는다』 『태양제』 『불의 나라』 『물의 나라』 『황야』 등이 모두 10만 부에서 30만 부씩 읽힌 놀라운 대중적 성공을 거둔 작가로서,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미학적 감동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인기작가였다.
박범신만큼 그 인기의 수명이 긴 작가도 드물다. 그의 대중적 성공은 그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사회현상 중 하나를 자기 소재로 삼을 줄 알았다는 데서 비롯된다. 또한 독자의 은밀한 욕망을 대리충족시켜주는 소설적 장치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아는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도 그의 득의의 영역이다. 그의 소설들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권력의 부패와 사회의 구조적 모순, 계층 혹은 빈부의 갈등을 포함하여, 세부적으로는 화려한 도시의 입성을 꿈꾸는 젊은 여성들의 허황된 꿈과 좌절을 그 특유의 문체를 통해 보여주어왔다. 감수성 위주의 문체로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과 황량함의 정조를 리얼리틱하게 담아냄으로써 그는 여러 해 동안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빛나는 감수성의 작가는 인기의 절정을 누리던 그 순간(1993년)에 돌연 절필을 선언,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충격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극심한 내적 분열과 상처, 점점 거세져가는 글쓰기의 고통’이 절필의 변(辯)이었다.
그런 그가 3년여의 세월 동안 침묵을 지키며 각고의 시간을 보낸 후에, 1996년 계간 『문학동네』에 중편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재개, 문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한껏 쏟아내고 있다. 1997년 말에 출간된 연작소설집 『흰 소가 끄는 수레』(창작과비평사 간)는 절필이란 고통에서 다시 몸을 일으킨 작가가 새로운 상승의 길을 모색해나가는 과정에 대해 쓴 통과제의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연작소설집은 박범신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보이며 90년대 우리 문학의 가장 중요한 수확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소멸해가는 존재들에 바치는, 시간의 주름에 관한 기록
박범신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
“『흰 소가 끄는 수레』는 나의 첫 소설집이고, 『침묵의 집』은 첫 장편소설이다. 나는 1996년에 등단한 신인작가다.”
그는 지금 신인작가의 자세로 문학에 몰두하고 있다. 그가 지난 절필의 늪에서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한 질문들―문학이란 무엇인가? 작가란 무엇인가? 인간존재란 무엇인가? 늙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생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투와 대답과 회의의 여정에, 그는 아직도 서 있는 것이다. 연작소설집 『흰 소가 끄는 수레』가 그 여정에 대한 직접적 토로였다면, 장편소설 『침묵의 집』은 그것의 예술적 승화라 할 수 있다.
『침묵의 집』은 시간 앞에 무기력하게 늙어가며 거대한 상실의 구덩이에 팽개쳐진 장년의 남자가 그 시간에 대해 일으키는 반역을 담고 있다. 지극히 평범하게 늙어가는 한 장년의 남자에게 불현듯 찾아온 불꽃 같은 사랑, 그것은 “잔인하고 황홀한 새로운 탄생의 시작”을 예감케 한다. 평온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중견기업 자금담당 이사로서, 일상의 삶을 살던 장년의 남자에게 어느 비 오는 날, 폭설처럼 그의 삶 속으로 쏟아져내리는 한 여인의 사랑이 찾아든 것이다. 시간에 매몰되어 내면 속에 움츠려 있던 자기 모멸과 삶에 대한 극도의 회의가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을 즈음, 그의 삶에 격렬한 충격으로 다가온 천예린이란 여자. 시인이자 화가인 그녀는 그에게 잠복해 있던 옛 꿈을 되살려내는 소중한 존재로 떠오르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버린다. 그 뒤 “사십대 말의 황황한 나이에 만났던 실존의 무섭고 황홀한 반란”이 시작되고, 그의 삶은 오로지 그녀만을 향해 온몸을 던지는 파멸의 과정, 머나먼 유랑의 길에 오른다. 배신한 천예린을 쫓아 아프리카 대륙을 거쳐 시베리아에서 북극해까지 가히 세계를 횡단하는, 주인공 김진영의 사랑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운명적 행보가 소설의 중심부를 압도한다. 숨바꼭질하듯 고통에 찬 술래잡기 끝에 두 남녀는 마침내 괴기스러울 만치 광포한 사랑의 축제를 벌이고, 설한풍 몰아치는 먼 이역에서 죽음을 요구하는 사랑에 광분한다.
“내 생의 마지막에 찾아와서 뒷덜미를 사정없이 후려친 여인,
그녀와의 광포한 사랑에 나는 매일 죽었고, 매일 다시 살아났다”
바이칼 호수의 한 섬에서 천예린이 몹쓸병으로 죽고, 그녀를 장사지낸 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진영 역시 다방여자와의 정사에서 복상사로 삶을 마감함으로써 사랑과 자유의 완성을 꾀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내 생의 마지막에 찾아와서 뒷덜미를 사정없이 후려친 여인, 그녀와의 광포한 사랑에 나는 매일 죽었고, 매일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김진영의 고백처럼 이 소설은 사랑과 죽음의 광시곡이기도 하다. 사랑의 광기와 낭만성을 이처럼 냉혹한 시각으로 파헤친 소설은 찾아보기 힘들다. 잔혹하리만치 그로테스크한 성애의 묘사와 광란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두 남녀의 관계는, 지옥의 아수라에 빠질 그런 행위를 통해 오히려 역설적으로 열반을 꿈꾸는 엑스터시를 담고 있다. 그녀 천예린은 과연 악마인가, 천사인가. 죽음을 앞두고 세상의 모든 추함을 다 짊어진 그녀의 육체, 그러나 그 육체의 파멸이 마지막으로 내뿜는 광채에 의해 도달하는 김진영의 순결한 오르가슴…… 죽음과 맺어져 있으되, 죽음조차 뛰어넘을 것 같은 잔인한 에로티시즘…… 이 소설은 그 어떤 이유로도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사랑의 절대성과, 광기 혹은 죽음과 에로티시즘이라는 문학의 오랜 주제에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투명하고 정밀한 문체로 인간 본능의 실체를 최저층까지 추적한 역동적 내면소설
그리운 먼 곳을 꿈꾸면서도 손발로 생생히 묘사해내기에 박범신의 작품은 관념적이지 않다. 관념과 서술은 극도로 절제하고 묘사로서 작품을 이끌기 때문에 독자들의 감성을 사정없이 사로잡는다. 소설 문장들은 마치 시를 녹여낸 듯이 은유와 상징들을 품고 있다. 알몸으로 싱그러운 바람을 맞듯이 받아들인 세계에 대한 묘사, 그 산문시 같은 문장들이 독자들의 가슴을 온통 헤쳐놓는다. 박범신의 소설은 그 특유의 문체와 더불어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를 저돌적으로 끝장을 내듯이 파고드는 신랄함에 피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이 소설에서 주제의식 못지않게 탁월한 성취를 이루고 있는 부분이 몇 가지 있다. 우선 김진영과 천예린이라는 인간의 내부를 샅샅이 훑어내는 생생한 묘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소설화해놓은 듯 박범신의 내면 묘사는 빼어나다. 촘촘한 언어의 그물로 빈틈없이 짜놓은 두 인물의 심리 묘사는, 장년을 넘어선 두 남녀의 일상의 반란과 사랑의 광기를 과장됨 없는 진실하고 순결한 행위로 받아들이게끔 만든다. 이런 점은 이 소설을 우리 문학에선 보기 드문, 인간 본능의 실체를 최저층까지 추적한 역동적인 내면소설로 규정케 한다.
다음으로 이 소설이 품고 있는 자연의 크기. 아프리카 케냐의 만년설, 스코틀랜드의 북해도 풍경, 카프카즈 산맥, 그리고 바이칼 호수 주변 등에 대한 풍광의 정밀한 묘사가 그것이다. 박범신은 단순히 이국적인 풍광 묘사로만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불완전한 욕망을 그 풍광에 대비시키고, 그 풍광에서 배태된 여러 민족의 신화와 전설들에 접목시켜 증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묻고 있다. ‘인간 욕구의 지향점과 죽음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아니면 애당초 같은 것인가?’를.
박범신 문학의 결정판이자 새로운 이정표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명징스런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 허무주의적 결말, 인간 내면의 심층을 집요하리만치 강렬하게 파헤치는 작가정신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박범신 문학에서 『침묵의 집』은 그 결정판이자 절정을 이룬다. 이 소설은 시린 듯한 언어, 팽팽한 긴장과 절제미, 그리고 비장감과 침통함을 기저에 깔고 인간존재의 근본 문제를 심도 있게 탐사하고 있다.
박범신, 그는 대중적 인기의 절정에서 내려와 자기 내면의 결곡한 작가정신을 추구하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오랜 작가적 경륜과 오십줄에 들어선 세월의 연륜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신인작가로 서 있다. 자기 내면에 귀기울이며, 자기 문학에 존재를 걸고 있는 작가다. 『침묵의 집』은 그런 그에게 문학적 재생의 신호탄이 될 것인가, 그의 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로 평가받을 것인가.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이 지적인 평자들에게 배반으로 읽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