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지성, 조르주 바타이유가 남긴 불후의 저서 『저주의 몫』 출간
당대 최고의 두 지성 장 폴 사르트르와 앙드레 브르통에게 15년의 간격을 두고 “미치광이”라는 혹독한 비난을 받았지만, 사후 미셸 푸코에게서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는 뒤늦은 최고의 찬사를 들었던 ‘광기’의 작가 조르주 바타이유의 일반경제학 에세이 『저주의 몫La part maudite』이 조한경 교수의 번역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67년 프랑스 미뉘 출판사에서 장 피엘Jean Piel 교수의 서문과 함께, 조르주 바타이유의 「소모의 개념La Notion de Depense」과 「저주의 몫」을 한데 묶어 ‘비평 총서Collection Critique’ 시리즈로 출간한 것을 완역한 것이다.
지적 전통의 구도에서 크게 벗어난 장소에서,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사유를 펼쳐온 바타이유의 불후의 저서 『저주의 몫』은 바타이유가 18년간의 구상 기간을 거쳐 출간한 작품으로, 바타이유의 이론서 중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탁월한 저서로 손꼽힌다. 바타이유가 이 책에서 천착하는 것은 ‘넘치는 에너지의 비생산적 소모’이다. 모든 문명사의 변화 원인을 잉여의 소비 방식에서 찾고 있는 바타이유는 비생산적 소모, 즉 ‘저주의 몫’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가 어떤 형태의 끔찍한 소비와 맞닥뜨리게 되는지를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 전방위적 성찰을 통해 깊이 있게 탐사한다. 뛰어난 문명론이기도 한 이 책은 ‘에로티즘’의 작가 바타이유의 사상적 근원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죽음과 에로티즘, 금기와 위반의 작가 바타이유가 탁월하게 천착하는 ‘비생산적 소모의 이론’
『저주의 몫』에는 바타이유 사상의 본질을 담은 「소모의 개념」과, 「소모의 개념」보다 20년 후에 씌어진 「저주의 몫」이 함께 실려 있다. 앞부분에 실린 「소모의 개념」은 세계에 대한, 또는 세계 속의 인간에 대한 성찰로서 「저주의 몫」의 진정한 원천이라 할 만한 글이다. 바타이유는 이 글에서 “생산과 획득이 소모와 갖는 어떤 부차적인 관계”를 밝히고 있는데, 획득, 생산, 보존이라는 일차적 필요성에 지배받는 ‘타산적인 평온의 세계’는 ‘편리한 환상’일 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으며, 사회의 생존 자체는 비생산적 소모의 규모를 비중 있게 늘릴 때만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사치, 도박, 공연, 종교 예식, 그리고 생식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벗어난 성행위, 예술, 좁은 의미의 시(詩) 등은 모두 비생산적인 소모의 양상이다. 소모의 개념은 문명사 해석의 근본까지 제공한다. “사실 생산과 획득의 형태는 역사적 발전 단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므로, 역사의 이해를 위해서는 생산과 획득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생산과 획득은 소모에 종속된 수단들에 불과하다.”
『저주의 몫』은 바타이유가 자신의 나머지 모든 작품들을 포괄하는 박물지 같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한 작품으로, 그의 나이 52세 때 출간되었다. 바타이유가 자신의 세계관, 즉 자연 철학, 인간 철학, 경제 철학, 역사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목적으로 쓴 유일한 책이며, 이 책의 밑바닥에는 ‘넘침’의 개념이 깔려 있다.
바타이유는 『저주의 몫』을 통해, 근대 경제의 증여 이론과 ‘일반경제’ 이론의 선구자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정치 경제학을 다룬 책이지만 이 안에는 에너지, 사회학, 인류학 및 역사에 대한 성찰도 담겨 있다. 18년의 구상 끝에 얻어낸 그 성과는 실로 눈부시다. 기존의 경제학에서 생산을 강조하기 위해 희소성에 근거를 두었다면 바타이유는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가 쓴 「증여에 관한 소론」에 착안하여 이와 반대되는 주장, 즉 “우리는 에너지의 넘침을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 넘치는 에너지는 어떤 형태의 생산에도 재투자될 수 없으며, 소진되어 그야말로 순수하게 상실되는 것이다. 고대 인류의 역사, 즉 고대 아즈텍인들의 희생 제의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 등을 예로 들면서, 바타이유는 몇몇 사회에서 적당한 소비의 형태를 어떻게 창출해왔는지 밝히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바타이유는 이러한 ‘저주의 몫’을 고려하려 들지 않는 사회가 어떤 형태의 끔찍한 소비와 맞닥뜨리게 되는지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은 글쓰기이다. 특히 패러독스의 철학을 만드는 일이다”
소설가, 시인, 에세이스트이자 경제학자, 철학자, 신비주의자였던 조르주 바타이유를 두고 롤랑 바르트는 “도대체 분류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엄청난 지적, 정치적 격랑의 시기였던 20세기 상반기를 가로지르는 바타이유의 방대하면서도 복잡한 사유세계는 니체와 체홉, 헤겔, 사드, 모스 등 다양한 지적 계보에 뿌리를 두고 있고, 또한 블랑쇼, 브르통, 사르트르, 카뮈 등의 현대 지성들과도 수많은 대화를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한 권의 책을 통해 운명적으로 조우한 니체,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 사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러시아 철학자 체홉과의 만남은 바타이유 철학의 ‘패러독스적인’ 측면을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타이유의 문체는 난해하다. 언어의 변형과 뒤틀기로 이상한 불협화음, 마치 균열된 상태의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바타이유의 언어 뒤틀기는 단순한 전치사의 대치로 나타나기도 하고, 단어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배치하여 문장 전체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이렇듯 언어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뒤틀기 작업으로, 바타이유의 문학작품은 “폐허의 무관심으로 가득 찬” 책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지니게 된다.
단 한 권에 담기에는 너무 벅찬 내용이지만, 한 인간이 우리에게 남긴 이 책은 교육을 위해서라는 말을 내세우지 않은 예상 밖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