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언어와 싸워야 하는 시인의 숙명은 산문에서조차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산문은 느슨한 시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바로 그 느슨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문학동네에서 새로 출간된 산문집『젖은 손으로 돌아보라』는 불필요한 장식이나 어설픈 기교를 다 떨쳐버린 무미(無味)의 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번잡스러운 일상에서 건져 올린 사유의 축제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에는 시인이 일상 속에서 건져 올린 사유의 불꽃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세상살이가 속되고 허망할수록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애쓰고, 매순간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을수록 살아있음의 격렬한 역동성을 확인하려는 시인의 태도가 바로 이 글들을 낳게 한 힘이다.
황동규의 산문은, 시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볍고 떫고 맑은 맛!"이 난다. 그것은 세상의 무거움을 충분히 짊어진 가벼움이며, 세상과 쉽사리 몸 섞지 않겠다는 결의를 담고 있는 떫음이며, 세상의 탁함을 받아들여 오래도록 걸러냄으로써 얻어진 맑음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을 관조하되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인생을 향유하되 인생을 허비하지 않는, 금욕적인 쾌락주의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여행과 음악과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며 그려낸 생의 지도
황동규의 산문에는 사람이 있다. 음악을 좋아해서 작곡가가 되고자 했던 한 청년, 오미자 술의 감동적인 빛깔에 취해 친구를 용서하게 된 술 애호가, 라디오 안테나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들을 생각하는 교수, 길섶에 피어 있는 달개비꽃에서 삶의 경이를 깨닫고 시를 짓는 시인, 아직 남은 자연을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길을 떠나는 여행객, IMF의 칼바람 속에서 아들 형제를 보육원에 맡기고 돌아서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서민. 거기서 우리는 "사람 속을 걸어/사람 밖으로 나"가는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여행과 일상, 음악과 시, 자연과 사람, 성과 속이 한데 어우러지며 그려낸 생의 지도다.
이 산문집에는 분위기를 위해 씌어진 글은 거의 없다. 나는 분위기 중심의 카뮈의 초기 산문을 좋아하지만, 거기에는 자신의 앞날이 불투명한 한 젊은이가 전신으로 세계와 만난 절박함의 기록이 들어 있다. 그것이 빠진 분위기 산문은 절박함의 시늉이 되기 쉽다. 이 책의 산문들에는 대개 각각 자신들을 쓰게 만든 이슈가 있었고, 다시 읽어보니 대부분의 이슈들은 쓴 시기와 관계없이 지금의 이슈들이 되어 있었다. 그 지금들을 독자와 공유하고 싶다. 수건에 채 훔치지 않은 젖은 손으로. ― 책머리에에서
이제 어느덧 해질 무렵이다. 생의 번잡한 먼지와 흙들로 더럽혀진 손을 씻고, 내실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라. 거기, 한 사람이 서 있으리라. 수십 년간 행복한 삶이 아닌 아름다운 삶을 그리워하며 온몸으로 시를 써온 이가. 이제, 그 낯익은 사람을 새롭게 만나야할 때다.
*2001년 5월 9일 발행/ISBN 89-8281-388-8 03810
*신국판/288쪽/7,500원
*편집담당: 김현정, 이수은 (927-6790 내선 217, 213)
불필요한 장식이나 어설픈 기교를 다 떨쳐버린 무미(無味)의 묘미. 여행과 음악과 자연이 어우러지며 그려낸 생의 지도. 황동규의 산문에는 사람이 있다. 어느덧 해질 무렵이다. 생의 번잡한 먼지와 흙들로 더럽혀진 손을 씻고, 내실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라. 거기, 한 사람이 서 있으리라. 수십 년간 행복한 삶이 아닌 아름다운 삶을 그리워하며 온몸으로 시를 써온 이가. 이제 그 낯익은 사람을 새롭게 만나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