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겁지 않게 늙은 시편들
나라 안 청령포를 비롯한 여러 명소부터 나라 밖 티베트나 천축까지 그의 폭넓은 공간상의 떠돎은 이번 시집에서도 여전히 나타난다. 그러나 그 이동은 옛날과는 달리 늙음 내지 나이 든 뒤의 떠돎으로 보여진다. 이 나이 듦에서 오는 관조와 여유는 죽음에 관한 담론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손이 어는지 터지는지 세상 모르고 함께 놀다가 이를테면, 고누놀이나 딱지치기를 하며 놀다가 "저녁 먹어라" 부르는 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달아나던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상복을 입고 혼자 서 있는 사내아이한테서./누런 변기 위 상복 대여 따위 스티커 너저분한 화장실 타일 벽에 "똥 누고 올게" 하고 제 집 뒷간으로 내빼더니 영 소식이 없던 날의 고누판이 어른거렸습니다./"짜식, 정말 치사한 놈이네!" 영안실 뒷마당 높다란 옹벽을 때리며 날아와 떨어지는 낙엽들이 친구가 던져두고 간 딱지장처럼 내 발등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 딱지, 너 다 가져!" 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전문
죽음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의 운명 같은 것이어서 체념과 동시에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죽음에 대하여 인간은 공포를 느끼고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잊고 지우고자 한다. 윤제림의 경우 죽음은 떳떳한 것도 남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느 날 돌연스럽게 무뢰배나 불한당처럼 닥쳐오고 모든 삶을 파괴하는 폭력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죽음을 덤덤하게 바라보고 또 진술한다. 어린 시절의 고누놀이나 딱지치기를 매개로 모든 직설적인 감정 토로나 잡된 사설 등을 극력 생략해놓은 것이다. 이같은 절제된 태도와 여유는 시인이 죽음도 덤덤하게 관조할 수 있는 나이가 된 탓일까. 시인 홍신선씨는 이처럼 심리적 거리를 확보한 채 죽음을 바라보고 거듭 삶을 되살필수 있는 이유는 윤제림의 결코 싱겁지 않은 늙음 때문이라 말한다. 그리하여 표제작 「사랑을 놓치다」에서도 여는 일상적인 사랑이 아닌 윤회 전생 과정에서 피차 엇나가고 비껴지나가야 했던 불교적 상상력을 밑바탕에 깐 사랑을 그려내고 그럼으로써 엇나가는 사랑의 참뜻을 행간 깊숙이 숨겨놓고 있는 것이리라.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그대는 번번이 먼길을 빙 돌아다녀서/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어느 마을이었습니다.//또 한 생애엔,/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모르고 잤습니다./명사산 달빛 곱던,/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사랑을 놓치다」 전문
이 책에 대하여
윤제림의 시들은 시간과 공간의 주름에서 태어난다.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을 압축하거나 확장하는 능력이 빼어나다. 죽음 너머를 바라보거나, 사랑 이후를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은 웅숭깊다. 그 웅숭깊음이 주름이어서 멀고 가까운 것, 높거나 낮은 것들을 다 품어낸다. 주름을 펼치거나 줄이며 그의 시들은 찌푸린 하늘을 씻고 언 땅을 덥힌다. 그러니 그의 시가 어찌 삶의 전모에 대한 지지가 아닐 수 있으랴. ―이문재(시인)
그가 다루고 있는 소재들은 작고 하찮은 것들이다. 목소리도 거세고 높지가 않고 조용하고 차분하다. 느릿느릿 혹은 가만가만 그는 그 작고 하찮은 것들 속에서 사람이 사는 참다운 뜻과 기쁨을 찾아내고 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잘 익은 석류나 조그만 보석 주머니를 연상하곤 했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껍질을 벗기면 그 속에 맛있는 알들이 촘촘히 박혀 있기도 하고, 예쁜 주머니 끈을 끄르면 그 속에서 아름다운 보석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이다. 시의 틀도 내용에 알맞게 단아하고 아름다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시를 읽는 즐거움을 제대로 맛보았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신경림(시인)
*2001년 9월 3일 발행/ISBN 89-8281-420-5 02810
*신사륙판/104쪽/값5,0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장한맘(927-6790, 내선 217, 214)
그가 다루고 있는 소재들은 작고 하찮은 것들이다. 목소리도 거세고 높지가 않고 조용하고 차분하다. 느릿느릿 혹은 가만가만 그는 그 작고 하찮은 것들 속에서 사람이 사는 참다운 뜻과 기쁨을 찾아내고 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을 제대로 맛보았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신경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