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에 이은 강연호의 세번째 시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밖을 향해 닫혀 있는 시보다는 안을 향해 열려 있기를 꿈꾸는 그의 시는 자기 자신을 꼬집으며 삶의 쓸쓸함에 대해, 고요에 대해, 우리를 글썽거리게 하는 것들에 대해 가만가만 중얼거린다. 인간의 의지라든가 다짐, 그리움, 절실함 등을 모두 포기하고 적멸의 세계에 젖어드는 자아의 내면을 점묘한 그의 명상적 어법 속에는 시선의 경계를 초월하는 그리움, 어떤 것으로도 충족되지 않는 도저한 그리움, 그러한 강인한 그리움의 지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완강한 한계의식이 드러난다. 이러한 한계의식은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보이도록 눈물 글썽한 그의 시선으로 이어지고 그리하여 내팽개치고 싶은 과거도 지루한 일상도 그의 시선을 통해 단단하게 빛나는 한 편의 시로 탄생하는 것이다.
탁자 위의 물방울이 마른 흔적 같은 시 쓰기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전문
이 한 편의 시는 존재와 흔적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물위에 번지는 파문은 흔적 그 자체이며 그것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부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전에 명확한 무엇이 존재했다는 것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파문을 일으킨 나뭇잎을 두고 보면 그 나뭇잎은 한 나무의 뿌리에서 퍼져나가 저마다의 가지에 매달려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던 존재들이다. 각각의 나뭇잎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고 무작정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흔들리게 되는 필연적 근거를 갖고 있다. 이것은 존재와 흔적이 상대의 일부를 자기 것으로 수용하는 상관성을 형성한다. 움직임이나 흔들림은 정지의 연속 형태라는 동일한 위상에 놓이며 물위에 떠 있는 나뭇잎이건 물위에 일어나는 파문이건, 모든 움직임과 그 자취는 존재의 뿌리에 연결되어 있다("저 나뭇잎의 고요는/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이는 흔들리는 나뭇잎이건, 떨어진 나뭇잎이건, 나뭇잎이 일으킨 파문이건, 파문조차 사라진 흔적이건, 그 유형 무형의 물상들은 다 뿌리를 지니고 있고 뿌리의 근원에는 존재자의 숙명적 비애가 내포되어 있다는 시인의 내면세계를 나타내는 증거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허무주의만을 피력하는 것은 아니다.
절구통만한 먹이를 문 개미 한 마리/발 밑으로 위태롭게 지나간다 저 미물/잠시 충동적인 살의가 내 발꿈치에 머문다/하지만 일용할 양식 외에는 눈길 주지 않는/저 삶의 절실한 몰두/절구통이 내 눈에는 좁쌀 한 톨이듯/한 뼘의 거리가 그에게는 이미 천산북로이므로/그는 지금 없는 길을 새로 내는 게 아니다/(……)/모두 오체투지의 생애를 살다 가는 것이다//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 ―「개미」 중에서
시인은 시행을 열어두고 상상의 여백을 남겨두던 그의 작법과는 매우 다른 종결법인 "그 경배를 짓밟지 마라"라는 구호적인 어구로 시를 끝맺었다. 모든 존재가 소멸로 귀결되는 것을 그대로 수락하던 시인이 삶의 절실한 몰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물방울 같은, 좌절된 열망의 흔적"이라 정의한 시쓰기는 이제 흔적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의미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 책에 대하여
요즘 강연호의 시가 부쩍 생각이 깊어졌다. 시가 생각의 깊이를 더하자, 그의 세계는 어느 한 군데 살아서 숨쉬지 않는 구석 없이 생기가 돈다. 호두알처럼 그의 시는 영근 소리를 내고, 파닥거리는 생선처럼 날비린내를 풍긴다.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보이도록 눈물 글썽한 그의 시선은 원래 타고난 시인의 천품이다. 눈물은 천품이요 생각은 이성인 것을, 천품의 알몸에 명징한 이성의 옷을 지어 입히자, 강연호의 시편들은 어느덧 현란한 지성의 꽃밭이다. ―송하춘(작가·고려대 교수)
그 누구를 향해 호되게 삿대질하거나 목청을 돋우는 법이 없다, 강연호의 시는. 밖을 향해 닫혀 있는 시보다는 안을 향해 열려 있는 시를 꿈꾼다. 그는 자기 자신을 슬쩍슬쩍 꼬집으며 삶의 쓸쓸함에 대해, 고요에 대해, 우리를 글썽거리게 하는 것들에 대해 가만가만 중얼거린다. 그리하여 내팽개치고 싶은 과거도 지루한 일상도 그에게 와서는 단단하게 빛나는 한 편의 시가 된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시읽기에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다. ―안도현(시인)
*2001년 9월 3일 발행/ISBN 89-8281-421-3 02810
*신사륙판/152쪽/값5,0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장한맘(927-6790, 내선 217, 214)
강연호의 시는 자기 자신을 슬쩍슬쩍 꼬집으며 삶의 쓸쓸함에 대해, 고요에 대해, 우리를 글썽거리게 하는 것들에 대해 가만가만 중얼거린다. 그리하여 내팽개치고 싶은 과거도 지루한 일상도 그에게 와서는 단단하게 빛나는 한 편의 시가 된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시읽기에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다. -안도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