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도시에서 이름 찾기
이신조는 삭막한 도시를 배경으로 익명화되고 사물화된 존재들과 그들 사이의 타자화된 관계들을 그려냄으로써 우리가 서 있는 우울한 실낙원의 세계를 담는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죽음과 부패로 얼룩진 화려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인물들은 끊임없이 죽음의 유혹에 시달린다. 또한 이름을 갖지 않은 사람들과 사물들, 숫자로만 규정되는 존재들, 혹은 여러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몸의 감각을 통해 사라진 이름, 존재의 비밀, 틈새를 찾아간다.
표제작 「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은 검정 그물 스타킹의 시선으로 아역 출신인, 한때 "잘나갔던", 그러나 현재는 홈쇼핑 케이블 프로그램의 제의나 받는 여배우를 바라본다. 숱한 불륜의 염문과 두 번의 이혼, 그녀의 대리인이자 매니저이자 코디네이터이자 재산관리자이자 연기지도자이자 가장 열렬한 팬이었던 엄마의 죽음, 이루지 못한 채 흰 새처럼 날아가버린 사랑, 연예계라는 아름답고 잔인한 정글 앞에서 쓸쓸하고 피로하고 시들어버린 여배우. 결국 여배우는 자신을 애정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스타킹으로 스스로 목을 조르고 난간 아래로 몸을 던진다.
「산책」에서는 Ella@######.com과 Zovenbang@######.com으로 존재하는 엘라와 좁은방이 이미테이션 트레비 분수 앞에서 만난다. 그들은 마치 벚나무와 플라타너스와 아카시아와 단풍나무와 버드나무 사이를 걷는 것처럼 즉석 베이커리 포숑을 지나, 클라니크와 시셰이도와 비오템과 크리스찬 디올과 랑콤과 지방시와 에스티 로더 사이를 산책하고, 롯데월드 어드벤처 매직아일랜드에서 꿈과 환상의 나라를 만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가짜다. 서로의 진짜 이름은 알지도 못하는 엘라와 좁은방은 여전히 각자의 세계에 따로 존재할 뿐이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남편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는 전체 20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 장의 순서를 뒤섞음으로써 파편화된 기억으로부터 존재의 비밀을 풀어가는 혼란스런 과정을 담고 있다.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나는 끊임없이 낯선 남편의 얼굴을 만난다. 기타를 치는 남편, 간이역 대합실의 남편, 병원 앞에서 활짝 웃는 남편,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축구공을 쫓아가는 남편, 쥐들이 갇힌 쥐덫에 불을 지른 후 쥐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 이 혼란스러운 과정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가는 과정이 되고 남편을 찾아가는 여정의 끝에서 나는 정작 실종된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어느 누구와도, 무엇과도 닮지 않은 자기 고유의 이름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다.
「콜링 유」는 고도의 섬과도 같은 도시의 삶에서 과연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본격적으로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모닝콜 서비스를 해주는 주인공 나에게 타인은 05, 96, 42와 같은 숫자화된 기호로서만 존재한다. 나는 그들의 나이도, 직업도, 취미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Nevermind라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황도경씨에 따르면 이는 무관심과 허무감 속에서 진행되는 현대인의 무미건조한 삶을 환기시키는 대사다. "이들이 알고 있는 많은 것들과 모르고 있는 많은 것들 사이에, 부재하는 인간관계와 길게 나열되는 사건, 사물들의 목록 사이에 고독하고 소외된 채 서로 무심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단면이 우울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밖에 부모의 파산으로 인한 남매의 억눌린 욕망과 짓씹혀진 육체, 그 찢겨진 몸과 꿈을 악착같이 재생시켜 세상을 향해 불온한 욕망을 방출시키는 「정류장에서 너무 먼 집」, 오래된 연인의 권태와 우울을 그린 「9½F」, 아무 곳에도 속할 수 없는 카레이스키 매춘부로 살아나가는 나타샤의 절망과 고독을 보여주는 「거울 여자」, 마른 오징어 같던 엄마와 아버지, 남동생을 떠나 서울로 온 나가 겪는 유부남과의 놀이 같던 사랑과 그 이후 「오징어」, 서울의 지형을 지도화하는 주인공이 자기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그린 「럭키 서울」 등 『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도시에 파묻힌 현대인들의 내면을 깊게 투시한다. 그 모든 절망과 고독의 노래 앞에서 아찔해짐은 고양이의 시선이 우리의 진실까지도 캐묻고 있음이리라.
이 책에 대하여
모든 것이 전도된 세계, 이신조의 소설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이렇게 문맥화한다. 하여, 이신조의 소설에서는 비디오방, 놀이공원, 호텔 등 인공낙원의 화려함이 인간의 고독, 권태, 도구화를 가져오는 실낙원의 징후로 읽히고, 인간 존재들의 숨가쁜 활동들이 모더니티가 만들어놓은 견고한 이미지들에 의해 조장된 목적 없는 모험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신조의 소설은 모든 욕망과 쾌락이 거짓인 이 황무지 속에서도 어떤 의미 있는 가치를 길어올리고자 한다. 그것은 타락한 세계로 편입되기 이전의 어떤 상태나 기억일 경우도 있고 또한 미친 모더니티가 우리 삶 속에서 지워버린 본질, 차이 등일 때도 있다. 어떤 경우든 이신조의 소설은 자본주의적 확실성에 의해 폐기된 불확실한 가치들에 끈질긴 시선을 보내고 있으며, 이 시선은 주체성 없는 주체들의 삶이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밀도 있게 만들어낸 핵심적인 계기이다. 등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예에게서 확실성 너머의 또다른 가치를 찾으려는 열정과 그 열정을 과장하지 않는 냉정함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경이롭다. ―류보선(문학평론가)
이신조의 소설들은 한 마리 고양이가 쓴 것이다. 콘크리트의 숲에서 살아가는, 이 작고 예민한 짐승은 부드러운 앞발 속에 날카로운 발톱을 감춘 채 도시의 어딘가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짐승의 움직임은 차분하고 때로 민첩하지만 대체로 게으르다. 이 교활한 게으름이야말로 고양이만의 것이다. 그렇게 권태를 가장한 채 세상을 어슬렁거리는 이 고양이에게서 습격자의 눈동자를 발견하는 이들은 드물다. 그 습격자의 눈동자에 비친 도시는 풍요로우나 가혹하며 익명 속에서 불우하며 무심한 살의로 가득한 곳이다. 그런 세상에서 한 마리 고양이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아한 발걸음과 은폐된 적의를 보존하면서도 누구와도 깊고 내밀한 지경을 형성하지 않을 그런 고양이로? 이신조의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그런 것이다. 공동체를 보존하고 세상을 건설하고 소외를 지양하는 일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믿는 소설, 그것은 분명 고양이의 것이다. ―김영하(소설가)
*2001년 9월 29일 발행/ISBN 89-8281-430-2 03810
*신국판/288쪽/값8,0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장한맘(927-6790, 내선 217, 214)
이신조의 소설을 읽는다. 사막 같은 도시의 미로를 헤매며 신기루 같은 낙원을 좇는 인물들의 욕망과 절망, 잊혀진 기억 속의 시간을 더듬어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외로운 여정, 환상 속의 그대를 향해 부르는 콜링 유……그리하여 다시, 가슴이 먹먹해진다.-황도경(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