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그리고 문화를 읽는 젊은눈
스스로를 아프게 통과하는 비판적 성찰의 젊은 눈들에 의해서 한 시대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상처와 열광의 시간을 다시 좇으며 자신들의 몸에 새겨진 시대정신을 해석하고자 하는 젊은 지성들, 그들의 살아 있는 눈을 찾아간다. 젊은 사회학자 김종엽 한신대 교수의 『시·대·유·감』에 이어 시인·문화평론가, 록 뮤지션 성기완씨의 『장밋빛 도살장 풍경』이 출간되었다. 이후로도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다방면의 젊은 저자들이 이 시리즈를 채워갈 것이다.
전방위 예술가의 새롭게 말하는 법
시인이자 대중음악평론가,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 뮤지션 성기완의 『장밋빛 도살장 풍경』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본격적인 대중음악비평은 제외되었지만, 저자의 주관심사가 음악인 이상, 그의 글에 내재되어 있는 음악적 색조를 간과할 수는 없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푸른 나뭇잎과 물컹한 흙과 조용한 벌레들의 숲이 아니라 광고문구와 쓰레기 봉지와 간판들로 이루어진 숲"에서 살며, "보고 지나다니며 눈과 귓속에 들어온 그것들에 반응한 결과"가 이 책이다. 비속한 현실을 거스르며, 겹겹의 문화 형태들을 투시하고 가로지르는 그의 시선은, 때로는 한국사회의 혼종성을 식민지적 질서와 연결하기도 하고 때로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오가며 산문형식을 벗어난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한다. 저자 스스로 21세기를 새로운 무엇의 시작이 아닌, 한 문명이 끝나가는 시기, 문명의 마지막 계단을 걸어내려오고 있는 시기라고 한바, 그의 새롭게 말하는 법이 21세기를 사는 독자들에게 대중문화에 대한 새로운 접속법으로 읽히리라 기대한다.
대중 속에 살기, 대중문화 읽기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세기의 전환은 새 세기에 즈음하여 변화하는 문화적 상황에 관하여 쓴 글이다. 저자는 여기서, 망각--모든 기억의 지워짐이 아니라 기억 저편에 있는 침묵의 이름, 침묵하고 있음으로 해서 기억의 존재를 일깨우는--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21세기의 예술과 대중 또한 망각의 한 형식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2부 조용한 매춘의 나라에서 살다는 남한이라는 특수한 지역에 살면서 겪은 문화적 체험담들이 주를 이룬다. 미국문화라는 슈퍼에고의 지배하에서 살아남기, 서태지와 스타시스템, n세대와 그 기호에 대한 여러 상징들, 우리 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상업성, 청소년 교육과 북한의 예술까지 전방위 예술가로서의 날카로운 눈으로 시대를 분석하고 있다. 제3부 장밋빛 도살장 풍경 속을 거닐다에서는 포르노그래피와 비트 문학, 표절, 테크노의 하위장르인 트랜스, 도박과 게임 등 문화의 여러 장르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들을 묶었다.
각 부의 끝에는 텍스트 리믹스가 달려 있다. 오지 않은 시간의 연대기 대마초 연대기 사랑의 이천년 등의 제목이 붙은 이 글들은 통상적인 산문의 형식을 벗어나 실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2003년부터의 미래 신문기사를 가상으로 엮고 1970년대 유신정권하에서의 신문기사를 편집하는 등 미래, 현재, 과거를 오가는 이 글들은 "궁극적으로는 평론이라든지 창작이라든지 하는 경계가 없는, 그 모든 것들이 리믹스된 상태의 글"이 글의 운명이라는 저자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 책에 대하여
성기완은 현실과 문화를 자기 식으로 뒤흔드는 만능 연출가다. 비속한 현실을 거스르며, 겹겹의 문화 형태들을 투시하고 가로지르며, 그는 보이지 않는 생의 심연으로 망각처럼 침강한다. 거기서 그는 식물성의 세계-나무(cosmic tree)를 희망처럼 기른다. 그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수액들이 세상과 인간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넨다. 조용한 나무의 언어들은 때때로 폭풍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그런 나무들을 식목하는 성기완의 산문정신은 부정과 탈(脫)부정의 긴장으로 온통 팽팽하다. --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교수)
이것은 더러운 전통을 스스로 버려버린 세대의 자기 고백이자 모색이다. 이 책에서 성기완이 토하고 있는 피냄새는 동물의 이빨 사이에서가 아니라 나무의 뿌리에서 뿜어져나오는 절규로 보아야 한다. 한국사회의 혼종성을 식민지적 질서와 연결하는 그의 자세는 꼬리를 잡혀버린 머리의 자유로움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극적이고, 또 그것 때문에 새롭다. --함성호(시인)
*2002년 2월 5일 발행/ISBN 89-8281-460-4 03810
*170*224/274쪽/값 9,0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장한맘(927-6790, 내선 217, 214)
나는 푸른 나뭇잎과 물컹한 흙과 조용한 벌레들의 숲이 아니라 광고문구와 쓰레기 봉지와 간판들로 이루어진 숲에 산다. 그 숲은 이 쓰레기 같은 자본주의 세상의 변방 먼 귀퉁이에서 썩어가는 조용한 매춘의 나라의, 조금 감상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쓸쓸하고 서러운 숲이다.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