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감수성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젊은 작가 11인의 테마 소설집 『거짓말』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이들 작가들은 거짓과 진실이 얽혀 있는 우리 현실의 이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또다른 세계를 그려 보이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벽을 넘나드는 이들의 젊은 상상력은 우리 소설의 미래를 이끄는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소설에서 거짓말은 진리와 실재라는 고전주의적 관념에 대비되는 미적 가상(Schein)에 대한 수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그것은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고 있는 비현실적 서사로, 혹은 의식과 맞서 대결하는 환상으로, 혹은 전도된 욕망의 현실을 표현하는 소설의 존재방식 그 자체에 대한 은유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 다양한 형식이 소설의 영토를 풍부하고 만들고 있음은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이다. 여기 열한 편의 거짓말들이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실재하는 거짓말, 이것이야말로 소설의 패러독스가 아닐 것인가. ―해설 중에서(손정수·문학평론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해체하는 젊은 소설
『거짓말』에 실려 있는 열한 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구경미 [광대버섯을 먹어라]
정신병을 앓는 나가 진술해가는 불안한 현실의 풍경들. 집 안에 틀어박혀 아버지와 함께 음식 만들기에만 몰두하며 살아가던 나. 어느 날 불쑥 한 여자가 그들만의 공간에 들어선다. 나의 시선에는 그녀와 아버지의 어두운 관계가 잘 잡히지 않는다. 무언가를 애타게 요구하듯 나를 바라보는 여자에게 나는, 현실의 혼란과 고통을 잊고자 환각 속에 머무는 인디언 청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디언들이 먹는 환각제, 광대버섯은 비루한 현실과 맞서는 나름의 안간힘이었던 것. 나의 정신적 질병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구경미 : 1972년 경남 의령 출생. 경남대 국문과 졸업.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김도언 [쉰한 개의 시퀀스를 가진 한 편의 농담―회전(回傳)]
병으로 누워 있는 아버지를 간호하며 군대 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 여자에게 조금씩 끌리는 옆방 남자, 남자가 취직한 출판사의 사장, 돈을 받고 사장과 가끔 관계를 갖는 여자, 여자에게 뚱뚱하다고 비웃음을 받는 또다른 여자, 여자의 애틋한 감정을 무시하는 남자, 남자에게 당하는 스트레스를 커피로 푸는 다른 한 남자…… 이렇게 서로의 관계가 회전하듯 얽혀 있는 모습을 익명의 기호놀이처럼 그리고 있다.
(김도언 : 1972년 충남 금산 출생. 대전대 국문과 졸업. 1998년 대전일보,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김도연 [아침못의 미궁]
지난밤을 함께 보낸 여자가 아침못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소실을 들은 의상. 그러나 그는 그 여자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홍련암으로 올라가면서 지난밤의 기억과 몇 해 전 그곳에서 사라져버린 재인을 다시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고, 찾으려 할수록 점점 더 진실은 미궁 속으로 숨어버린다.
(김도연 : 1966년 강원 평창 출생. 강원대 불문과 졸업. 1991년 강원일보, 199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00년 중앙신인문학상 당선.)
김문숙 [냉동인간의 최후]
1925년에 태어났지만 50년 동안 냉동되어 있다 다시 살아난 연. 그는 변해버린 세상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다. 남자로 태어났으나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성전환수술을 받은 수.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세상도, 자신도 그것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에서 그들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김문숙 : 1971년 서울 출생. 효성여대 심리학과 졸업. 1999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김숨 「골목」
가장 먼저 어머니, 다음엔 동생들, 마지막엔 아버지까지 떠나간 집. 그 집과 세상을 이어주는 좁고 어두운 골목. 그곳에서 사람들은 종종 길을 잃는다. 이제는 아무도 어두운 길을 지나 버려진 아이에게 돌아오지 않고, 아이는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다 그곳에서 나가는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다.
(김숨 : 1974년 울산 출생. 대전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1998년 문학동네 동계문예공모 당선.)
신승철 [연세고시원 전말기]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전념하기로 작정한 소설가. 그는 생의 역작으로 기록될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연세고시원의 구석방에 처박힌다. 아무도 말을 걸거나 알은체하지 않는 그곳 고시원은 그러나 소설쓰기의 미로가 시작되는 출구 없는 감옥이었다. 소설쓰기의 자의식이 빚어낸 환영이었던 것.
(신승철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199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양선미 [어드벤처 그린반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아파트촌의 중국집 그린반점. 주인 부부는 일상의 권태와 무료함에 서서히 지쳐간다. 그러던 어느 날 쓰레기봉투 속에서 수표뭉치를 발견한 이들은 백일몽 같은 일상 탈출을 꿈꾼다.
(양선미 : 1967년 대전 출생. 목원대 국어교육과 졸업. 199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현종 [미호(美虎)]
미호는 여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곳을 지나가는 그 누구와도 깊은 인연을 맺는 것을 피해온 그녀. 하지만 문득 다가온 한 남자에게 오랫동안 지켜왔던 금기를 스스로 깬다. 엇갈리는 욕망의 화살표를 긍정하기까지 인간은 어떤 가면을 필요로 하는가?
(오현종 : 1973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졸업. 명지대 대학원 문창과 재학중. 1999년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
태기수 [마로니에 공원에 이구아나가 산다]
꿈꾸어오던 것을 이루기 위해 자기 안의 무언가를 주어버린 지나는 조금씩 변해간다. 그런 지나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나도 조금씩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어느 날 누군가를 죽였다는 지나의 전화를 받게 된다. 이구아나의 환각을 통해 존재의 소외를 탐색한다.
(태기수 : 1968년 전북 임실 출생. 추계예대 문창과 졸업.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지혜 [햇빛 밝은]
어느 햇빛 밝은 날 자살 동호회 회원들이 모임을 갖는다. 자신이 시도한 자살의 경험을 털어놓고 더 나은 자살 방법을 의논하던 그들은 동반자살을 약속한다. 모임이 끝나고 환한 거리를 걷던 E는 교미중에 트럭에 깔려 죽는 사마귀 한 쌍을 보게 된다. 죽음을 길들이려는 안타까운 모색.
(한지혜 : 1972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창과 졸업. 199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한차현 [메모리즈 아 메이드 오브 디스]
영화배우 리자 버틀렛을 좋아하는 남자는 그녀를 꼭 닮은 한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자살했고, 그는 몇 명의 여자를 만나며 2년여의 시간을 보내왔다. 어느 날 리자 버틀렛을 닮은 여자를 만나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리는 사랑의 실체를 탐문한다.
(한차현 : 1970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 동양어문학부 졸업. 1998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이 책에 대하여
한두 작품을 예외로 한다면, 우리 현대 소설문학의 전통과 그 양식으로부터 오늘의 젊은 작가들이 자유롭다는 것을 『거짓말』은 보여주고 있다. 낯선 환상성으로 무장한 그들, 젊은 작가들은 전통적 소설문법의 해체를 통해 자신들의 시대와 전체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이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이를테면 고독한 자의식의 방에서 이상하고 슬픈 단독자의 축제를 기획 연출 연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한 개의 이 쓸쓸한 퍼포먼스는 일부 독자들에겐 혹시 거짓말일지 몰라도 그들 자신들에겐 철저히 참말이다. -박범신(소설가·명지대 교수)
아닐 수도 있지만, 작금의 문학 내외적 환경은 동인의 시대가 다시 찾아올 것을 예고한다. 개성 있는 열한 명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 만든 이 작품집은 아마도 그 시대가 이미 찾아왔음을 알리는 시그널인지 모른다. 문학은 언제나 신인을 기다린다. 새로운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무장한 젊은 작가들에 의해 낡은 문학은 갱신되어왔다. 이 시대는 지난 시대를 갱신했고, 다음 시대는 이 시대를 갱신할 것이다. 열한 명의 개성들을 만나는 기쁨이 크다. 이들이야말로 위기에 처한 우리 소설을 구할 다음 세대들이 아닌가. -이승우(소설가·조선대 교수)
나는 여기 열한 명의 작가들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지켜봐왔다. 이들은 우리 문단에 제일 늦게 합류했지만, 그것의 가장 새로움을 선두에서 펼쳐 보이는 작가들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들을 귀하게 여기는 건 일군의 신세대 작가들 가운데 이들이야말로 문단 어느 구석에도 빚짐 없이 스스로 먼길을 준비하여 출발한 독립군들이란 점이다. 그 독립군들이 희대의 거짓말 경연대회를 열고, 지금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현실과 거짓말의 경계조차 모호한 지점에서 그들은 저마다의 빛깔로 아슬아슬하게 거짓말을 하고, 우리는 그들의 거짓말에서 거짓말보다 더 아슬아슬한 우리의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순원(소설가)
* 2002년 3월 27일 발행/ISBN 89-8281-488-4 03810
* 신국판/320쪽/값8,500원
* 담당편집: 김현정, 손미선(927-6790, 내선 217, 212)
문학은 언제나 신인을 기다린다. 새로운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무장한 젊은 작가들에 의해 낡은 문학은 갱신되어왔다. 이 시대는 지난 시대를 갱신했고, 다음 시대는 이 시대를 갱신할 것이다. 열한 명의 개성들을 만나는 기쁨이 크다. 이들이야말로 위기에 처한 우리 소설을 구할 다음 세대들이 아닌가. 이승우(소설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