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한 텍스트 읽기와 맥락의 비평을 적절히 조화시켜온 박혜경씨의 평론집 『문학의 신비와 우울』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비평 속에서 꿈꾸기』 『상처와 응시』 『세기말의 서정성』 『황순원 문학의 설화성과 근대성』에 이은 다섯번째 평론집인 이 책에서 박혜경은 문학일반의 문제를 점검하는 동시에, 명쾌한 어조로 문학과 삶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다.
이탈리아 초현실주의 미술가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의 <문학의 신비와 우울(Myst re et M lancolie dune Rue)>에서 따온 평론집의 제목에 대해 박혜경은, "문학에 대한 짝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내게는 문학이 여전히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신비와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우울을 일깨우는 대상으로 다가오"며, "문학이 끌어안고 있는 그 신비의 아우라가 문학의 자리를 위협하는 욕망의 거센 파고에 휩쓸려 점차 황폐하게 고갈되어 가는 듯한 요즘의 문학 주변의 상황을 지켜보는 우울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언어라는 존재의 사슬에 얽매인 채 언어 너머의 심연을 들어다보는 문학은 그 생의 신비와 우울 사이에서 배회하는 영원한 방랑자의 언어가 아닐까? 이해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삶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는 그 불길하고도 매혹적인 심연의 깊이를 응시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문학의 길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책머리에 중에서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문학의 현재를 점검하여 그 미래를 그려보는 「문학, 유령의 삶」, 1990년대 우리 소설을 돌아보는 「소설이 주체의 위기를 살아가는 방식」, 남성작가들이 보여주는 여성 이미지의 가능성과 한계를 타진해본 「그녀들의 초상」, 변화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삶을 추적하는 「전통적 가족관계의 변화와 개인의식의 성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부에서는 신경숙 구효서 최윤 양귀자의 작품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한편, 『불의 강』(오정희) 『독충』(이제하)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김연경) 『미로 게임』(김설) 『라디오』(류가미) 『마녀물고기』(이평재) 등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어간다. 더불어 「소설과의 짧은 동행」에서는 『호출』(김영하) 『내 생의 알리바이』(공선옥)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전경린) 『은행나무 아래로 오는 사람』(박자경)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박범신)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평하고 있다.
3부에서는 고전소설적 요소를 작품에 도입한 대표적인 작품인 최인훈의 「춘향뎐」 「놀부뎐」 「구운몽」에서 소설가의 실험 정신과 근대적 개인의식에 대한 관심을 발견해낸다. 또 자신의 등단작인 「폐쇄와 부정의 회로―이상(李 ) 소설론」을 수정·보완하여 처음으로 수록했다. 1986년에 발표했던 이 글을 다시 읽고 수정하면서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에 대하여
박혜경의 비평은 특정한 논제를 다루는 문학비평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한다. 그러나 단순한 논리도 공연히 복잡하게 만드는 쪽이 아니라 복잡한 논리도 오히려 명쾌한 단순성으로 바꾸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러한 능력은 문학작품의 의미와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문학일반의 문제를 점검하며 문학과 삶의 관계를 탐구하는 통찰력의 소산일 것이다. 문학의 새로운 동향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유행사조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태도나, 비평언어의 쇄신을 추구하면서도 직업적 방언이나 은어에 빠지지 않는 것도 그와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비평적 해석과 판단이라는 점에서 박혜경은 신뢰할 만한, 그리 많지 않은 현역비평가 중 한 사람이다. -홍기삼(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
박혜경의 비평은 치밀하고, 차분하다. 결코 거대담론에 작품을 함몰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작품이 일종의 관념적 여성성 지향과 같은 육체 없는 언어 놀이에 빠질 때는 매우 신랄하다. 박혜경의 나직나직하고 섬세한 비평 문장은 작품 내부를 가로지르거나 작품들끼리의 상호조응을 통해 텍스트의 결과 틀을 투명하게 줌인해 보여주는 데 기여한다. 그 결과 우리는 작품 속으로 삼투하여 대상이 된 작품과 한 몸을 이루는 비평적 글쓰기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작품과 비평이 서로 스며들면서 하나의 맥락으로 솟아올라 사회 내부에 적층된 제도 그 자체 속에 도사리고 있는 한계점,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문학적 존재자의 비의를 드러내는 것도 목격하게 된다. 나는 비평가의 손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공생을 실현하게 된 박혜경의 비평적 대상이 된 작품들은 참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혜순(시인·서울예대 교수)
문학을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하는 열어줌의 미학
박혜경의 글은 오늘의 우리 평단이 잃어가고 있는 풍요한 미덕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는 작품을 정확하게 읽고 그 맥락을 텍스트 안과 밖으로 바르게 잡아주며 그 현상과 의미를 따뜻하게 품어올린다. 그 태도는 문학을 아름답고 풍성한 실체로 만들어주고 그를 통하여 세계와 언어에 대한 공감의 지평을 열어준다. 이 열어줌의 미학은 그의 단단하면서도 섬세한 문체와 조응하여 그의 비평 자체가 열린 정신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도록 우리의 눈을 넓혀주고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깨우쳐준다. 문학이 주변으로 밀려나고 평론이 문학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기에 그의 비평적 작업은 이제 그래서 더욱 소중한 글쓰기로 바라보인다. -김병익(문학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